[황교진 에세이] 돈 문제의 그늘에서 결핍은 아름다웠다
[황교진 에세이] 돈 문제의 그늘에서 결핍은 아름다웠다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3.12.01 0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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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병간호, 적은 월급에 많은 지출에도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은 이유
어머니를 침상에서 말끔히 씻겨드린 후엔 꼭 우리 모자 손 사진을 찍었다
어머니를 침상에서 말끔히 씻겨드린 후엔 꼭 우리 모자 손 사진을 찍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거의 7년의 프리랜서 생활을 막 청산했다.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한 강연기업을 마지막 회사로 다닌 뒤 2017년 소셜벤처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그 상금으로 창업을 해서 예비사회적기업 지정을 받았다. 사회적기업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착한 기업이지만,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구조를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딱히 일정한 수입이 없는 오랜 시간을 버티며 책 편집, 창업 교육, 인터뷰 작가 등 N잡러로 살아왔다. 그러다 지난 11월부터 디멘시아뉴스 편집국에 출근하고 있다.

마지막 회사는 나에게 꼭 맞는 분위기였다. 의사 결정, 기획, 출근 시간 모두 직원이 결정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젊은 기업이었다. 업무 보고서도 없었고, 외근 일정도 스스로 정하고, 휴가 신청도 자유로웠다. 팀원 없이 혼자 출판팀 세팅을 마치고 다양한 기획 아이템도 정비해 두었는데 회사가 심각한 재정 위기에 몰리는 바람에 가장으로서 버티는 데 한계를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회사를 일으켜 보려고 모든 인맥을 동원해 투자 유치를 설득해 보았지만 한 건도 이루지 못했다. 사장이 아닌데도 사장처럼 고민하다 심각한 번아웃이 찾아왔다. 생활비는 개인 대출을 통해 어느 정도 융통했지만, 회사에서 내가 기획 출간한 책과 앞으로 펴낼 책들에 대한 사업비가 묘연해 출구를 찾다가 지쳐갔다.

고심 끝에 대표에게 과감하게 구조 조정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내용을 전하고 퇴사의 뜻을 밝혔다. 어려운 회사에 숟가락 하나라도 덜어내는 것만이 도움이 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최선을 다해도 결과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어머니 병 간호의 끝은 보이지 않아 심각한 무기력감이 덮쳐왔다. 매달 어머니 병원비 해결에 대한 책임감으로 어깨에 큰 바위가 올려져 있었고, 버티고 또 버티다가 번아웃이 오고 말았다. 간단한 서류 한 장 쓰기 어려운 상태로 점점 악화돼 나는 어머니 병간호에 힘을 쏟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직장 생활이 무너진 데다 조금씩 악화돼 가는 병상의 어머니를 보며 무기력감과 소외감으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돈 문제는 계속 눌러왔고 사방은 어둡고 답답한 벽뿐이었다.

가장으로서 돈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무에 책밥(출판인이 버는 돈)으로는 답이 안 나왔다. 책이 안 팔리는 시대에 책을 만들어 매달 병원비 해결하며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가정의 필요를 채운다는 건 우직한 미련함이다. 부수입으로 도움이 돼 온 강연 요청도 뜸해진 지 오래였다. 요양병원에서 장기 중환자로 계신 어머니를 간호해 드리고 홀로 병원비를 마련하면서 어머니 간호가 힘들다거나 멈추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단지 그 돈 문제가 버거웠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20년 동안 책 편집과 글쓰기, 강연 등으로 병원비를 마련했고 가족의 생계비 또한 해결해 왔다. 오랜 세월 신용불량자의 위기에 처해 있었어도 제2, 제3 금융권에 손 벌린 적 없고 지인에게 돈을 빌린 적도 없다. 그러면서 가족을 굶기거나 파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버는 출판사 급여로 어머니 병원비를 어떻게 해결해 왔냐고 신기해한다. 그 병원비 다 모으면 웬만한 아파트 전세금은 충분히 됐을 것이다. 돌아보면 내가 버는 돈보다 도움을 받은 돈이 훨씬 많았다. 하나님이 보내 주신 천사의 손길들이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결핍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돈에 관한 에피소드가 많다. 첫 편은 가벼운 서론 격이다. 돈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서 당황스럽다. 지나간 돈 문제는 감동이지만 지금 현실에서 마주하는 돈 문제는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다. 이 고통을 견딜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내 삶에 주어진 만나를 잘 기억해야 한다. (만나: 기독교 용어,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던 중, 광야에서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없어 방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날마다 내려 주신 기적의 음식)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신해철의 곡 <Money>의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사람보다도 위에 있고 종교보다도 강하다. 겉으로는 다 아니라고 말을 하지만, 약한 자는 밟아버린다. 강한 자에겐 편하다. 경배하라 그 이름은 돈, 돈, 돈, 돈."

돈이 종교보다도 강하다는 말이 귓전을 때린다. 하긴 우리가 하는 기도에 돈 문제를 빼면 내용이 거의 없다. 삶의 문제는 대부분 돈과 연결돼 있다. 생존이 목적이던 시대를 지나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로 다수의 빈자를 위축시키는 시대에 억대 연봉자도 돈이 부족하다고 한다. 돈은 '잘먹고사니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우는 사자처럼 입을 벌리며 공포감을 안긴다. 오늘 겨우 살았지만 내일은 심각해질 거라는 실체 없는 불안감으로 불면과 악몽의 밤을 겪는다.

나는 연봉을 4천만 원 넘게 받아본 적이 없다. 첫 직장인 대기업 홍보팀에서 2천4백만 원 연봉의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해 3천5백만 원의 정규직에 오른 뒤 회사를 옮기면서 그 정도 수준에서 10년 이상 여러 출판사에서 일했다. 아이가 둘 태어났고, 어머니 병원비는 고액 연봉 전문직도 감당하기 힘든 지출로 매달 빠져나갔다. 집은 안양 지역에 나온 23평 공공임대주택을 얻어 2년마다 추가 보증금을 내고 매달 임차료를 지불하면서 10년을 살다가 계약이 만료되면서 감사하게도 동탄의 10년 공공임대주택을 얻었다. 다시 10년이 되면 이사할 집을 찾아야 한다.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은 우리 가족에게 큰 도움이 됐다. 그래도 매달 어머니 병원비를 빼고 남은 소소한 돈으로 생활해 나가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돈 문제로 지칠 수밖에 없는 삶이지만 돌아보면 은혜와 기적이란 말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야말로 성경의 만나를 경험하며 하루하루 필요한 만큼의 돈으로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더라도 내가 계속 감사하며 견딜 수 있을까? 늘 이 고민과 싸우며 살아왔다.


대학 4학년 말, 졸업시험 몇 과목을 남겨 둔 날 어머니가 뇌출혈로 의식을 잃으셨다. 큰 병원 두 곳에서 외면당하고 구의동 혜민병원에서 어렵게 뇌수술한 후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다시 어렵게 경희의료원으로 옮긴 뒤 매달 500만 원가량의 병원비가 들어갔다. 밑 빠진 독처럼 우리 집 재정은 계속 빠져나갔고, 어머니의 쾌유는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다. 병원비 외에도 내게 교통비, 식비 등이 필요했는데 돌아보니 그 돈이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의료진으로부터 가망 없는 퇴원을 명 받고 집으로 모시고 오기 전에 경희의료원 부인과병동에 가장 오래 있었다. 낮에만 간병인을 쓰고 매일 밤과 아침, 주말과 주일은 내가 꼬박 간호해야 했다. 밥은 거의 굶다시피 하거나 병원 입구 부근 김밥집에서 급하게 한 줄 먹고 병실로 급히 달려오곤 했는데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배고픈 시장기로 괴롭지는 않았다. 6인 병실 앞 베드의 남매 보호자가 도시락을 나눠주기도 했고, 옆 베드 할머니 환자의 아들이 강남의 부유한 분이었는데 자장면을 시켜주기도 했다. 1일 1식으로 사는 날이 많았다. 중요한 건 생업 전선에 뛰어든 동생에게 용돈을 타지 않았어도 내 주머니가 비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혜민병원 중환자실에 계신 어머니를 돌볼 때, 내가 다니던 교회 청년회 임원들이 방문해서 청년회에서 모은 헌금을 건네주었다. 나는 대학부에 있었기 때문에 같은 교회라는 것 외에는 관계가 없던 선배들이 주신 돈을 받기가 쑥스러웠지만, 하나님이 보내시는 도움으로 여기고 받았다. 그렇게 교회 공동체의 사랑과 관심이 없었다면 20년 동안 어머니의 무의식 상태를 돌보는 고통을 하루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경희의료원 신경외과 병동에서는 정신을 좀 차리고 당시 PC통신 천리안 IVF(기독학생회) 동호회에 기도제목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동호회에서 내 글을 눈여겨본 여성 한 분이 병실을 찾아왔다. 그녀는 암 말기의 어머니를 돌보고 있어 내 글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야맹증이 있어 야간 외출이 어려운데도 병실에서 밤늦게까지 내 말동무를 해주었다. 병실에 올 때 내게 고기를 사주려고 작정했는데, 수시로 석션과 체위 변경을 해야 해서 병실을 비울 수 없는 내 모습에 분식을 배달시켜 주었다.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끼리 먹는 떡볶이와 순대는 참 맛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따뜻하고 고마웠다. 돌아가기 전에 편지를 주고 갔는데 거기에 소정의 헌금이 있었다. 편지에는, 자신도 여유가 많지 않지만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게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며 꼭 고기를 사 먹으라고 쓰여 있었다. 그 후에도 몇 번 더 병실을 찾아와 나와 어머니를 만나고 갔다.

나를 찾아온 그 달에 그녀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나는 간병인과 교대한 시간에 빈소가 차려진 세브란스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다. 거의 두 계절을 경희의료원 신경외과 병동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초여름 장례식장 주변에서 마주한 햇살의 화려함과 낯섦에 당황했다. 그녀는 장례를 마치고 시간이 좀 흐른 어느 날 밤, 병실 전화로 내게 안부를 묻다가 내가 잠시 통화를 중단하고 어머니 기저귀를 갈 때 펑펑 울었다. 하늘로 떠나보낸 어머니가 그립다는 그녀의 울음에 난 그저 들어주는 것 외에는 전할 수 있는 위로가 없었다. 후에 대학생 선교단체 간사로 일한 정화, 그녀의 이름이다.

그 천리안 동호회에 경희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박경규라는 친구가 있었다. 경희대에서 주일 모임이 끝나면 어머니 병실에 찾아와 방울토마토와 설교 테이프를 건네주었다. 내가 주일에 예배도 드리지 못하는 사정을 알고는 간호를 교대해 나를 병원 내 교회에 다녀올 수 있게 해주려고 했단다. 전문적인 간호 테크닉이 필요한 중환자 간호임을 알고는 곁에서 말동무를 해주고 돌아갔다. 그는 자주 병실에 찾아왔다. 몇 달 후 경규는 대학원 졸업 선물로 받은 구두티켓을, 몇 번을 망설이다 마음 변하기 전에 해치우는 거라며 등기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캄보디아 선교사로 떠났다.

정화도 경규도 어머니 간호하면서 알게 된 친구들이다. 나는 그들을 통해 출애굽기의 만나를 경험했다. 경규는 지금도 연락하는 이십년지기 친구가 되었다. 세 딸의 아빠로 다이내믹하게 살아간다. 세상 참 좁다. 경규의 아내는 대학 시절 내가 리더로 성경공부한 소그룹 멤버의 동생이다.

봄이 지나 초여름엔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어머니 간호하기 2년 전에 한양대에서 열린 ‘96선교한국’에 조장으로 참석한 적 있다. 당시 내 조원 중에 목사님 딸이면서 신학교에서 선교학을 전공하던 여학생이 있었다. 연합수련회에서 나를 본 적 있다며 먼저 알아봐 주었다. 우리는 마치 남매처럼 꼭 붙어 다니며 다양한 얘기를 나눴다. 그 조원이 2년 만에 갑자기 내게 안부 전화를 주었다. 지금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의식이 없는 어머니를 경희의료원에서 간호 중이라는 내 말에, 그녀는 병실로 찾아왔다.

난 어렸을 때 맞벌이 부모님 밑에서 빈 집을 지키며 혼자 밥을 차려 먹는 아이였다. 주로 물에 말은 밥에 간장을 찍어 먹었다. 작은 간장 종지에 숟가락을 넣으면 숟가락 끝에 간장이 살짝 걸린다. 그게 반찬의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편식이 심했고, 고추는 죽어도 못 먹는다. 또 병원에선 매일 김밥 한 줄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어서 김밥에는 신물이 나 있던 터였다. 병실에 그 조원이 왔다.

“오빠, 식사 안 했죠? 내가 김밥 싸왔어요.”

“어... 음... 그래, 오늘은 네가 싸온 거 먹어 보자. 무슨 김밥인데?”

“이거 고추김밥이에요.”

‘허걱!'(1990년대 말에는 지금의 ‘헐’이 ‘허걱’이었다.)

그 조원은 웃을 일 없던 내게 한참 재잘거리며 기쁨조 역할을 톡톡히 하며 미소 짓게 했다. 가기 전에 조심스레 봉투를 내밀었다. 오빠 사는 얘기 듣고 마음이 아파서 헌금하고 싶었다고. 거기엔 대학생 신분으로는 꽤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그때가 내 주머니 사정이 아주 안 좋아졌을 때였다. 미안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안 받을 수도 없었다. 남은 고추김밥을 먹다가 울컥했다. 고추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울었다.

(이런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서 다음 글에 이어서 쓰기로 한다.)

 

황교진
디멘시아뉴스 편집국장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로 활동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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