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어머니
고등학교 진학 후 셋방살이를 다시 시작했다. 서울 생활은 서대문구 현저동의 달동네에서 시작했다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암사동의 방 두 칸짜리 이층집으로 이사 오면서 살림이 나아졌지만, 어머니의 고생은 그치지 않았다.
그 집을 팔고 다시 세를 얻어 생활한 곳에서 빚쟁이들이 종종 찾아오곤 했다. 주변에 불량배들을 만나 등하굣길에 회수권이나 시계를 뺏긴 적도 있었다.
고3이 되면서 고덕동의 18평짜리 시영아파트로 이사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시고 살기에는 몹시 좁은 셋집이었고 엘리베이터 없는 저층형이었다.
주변에 논두렁 밭두렁이 있었고 생애 첫 아파트 생활이기도 했다. 연탄불로 난방했고 부엌 벽 아래쪽에 쓰레기를 낙하해서 버리는 작은 문이 있었다. 겨울에는 물을 끓여서 머리를 감았다.
고3 때 입시 공부로 마음이 힘들 때마다 아파트 바로 옆의 개발제한구역으로 표기된 시골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지금은 고덕동, 상암동 일대가 고급 아파트 단지로 변모해 있지만 당시만 해도 공기 좋은 시골이었다.
나는 입시를 앞두고도 그 시골의 자연 속을 걸으면서 우울함, 그리움, 고독함을 달래며 홀로 걷는 산책을 즐겼다. 내게 꽃과 나무, 논두렁길 등에서 평화를 느끼는 감성이 짙은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집에 오면 안개꽃에 쌓인 노란 프리지어가 담긴 향기로운 꽃병을 볼 수 있는 날이 있었다. 같이 사신 할머니는 엄마가 아무 쓸데 없는 곳에 돈 쓴다고 핀잔을 주셨다.
중간 상인들을 상대로 하는 살벌한 동대문 새벽시장 일로 피곤한 하루하루를 견디던 엄마는 집 안 한구석을 꽃으로 장식하면서 자존감을 지키셨다. 적성에 안 맞는 일을 생존 때문에 버티면서 일상의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다. 엄마의 삶의 이유는 나와 동생의 성장이었다.
형편이 좋았다면 꽃병에 싱싱한 꽃이 자주 꽂혀 있었을 텐데, 고작 1년에 한두 번 정도 어머니가 사 오신 노란 프리지어를 볼 수 있었다. 그런 날은 나도 기분이 좋았다.
입시에 대한 중압감, 어머니의 고단함을 그칠 수 있게 살림을 일으켜야 한다는 책임감 등으로 마음 무거운 고교생이던 나는 엄마의 꽃을 보면 중산층이라도 된 듯한 여유가 생기고 밝아졌다.
안개꽃에 쌓인 프리지어로 긴장이 풀어지면서 우리 집에도 꽃향기의 여유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포근해졌다. 집에 꽃이 있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 잠들 시간 없이 힘든 바깥일과 가사일을 병행하는 어머니 정서에 마르지 않는 소녀소녀한 아기자기함이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코를 킁킁대면서 프리지어 향기를 맡고는 데생을 그리는 화가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꽃병에 시선을 한참 두었다.
그때 용돈을 아껴서라도 예쁜 프리지어 한 다발 사 들고 어머니 품에 안겨드릴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엄마도 할머니처럼 내게 돈을 아무 쓸데 없는 곳에 쓴다고 핀잔을 주셨을까?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잘 해드려야지 생각하면서도 지금 조그마한 이벤트로 기쁘게 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꽃이 가까이 있으면 해로운 중환자가 된 어머니 곁에서 화사한 안개꽃 프리지어를 한 다발 안겨드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다만 어머니 몸에 환자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도록 깨끗이 씻겨드리며 은은한 향기가 나도록 유지해 드리는 나의 돌봄으로 꽃 한 다발 전해드리지 못한 아쉬움을 대신했다.
안개꽃에 쌓인 프리지어는 사랑이다.
엄마의 웃음
집에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가끔 주말에 모자가 마주하는 시간엔 TV 앞에서 서로 별 얘기 없이 바보상자를 감상하곤 했다. 엄마가 광장시장 일에서 잠시 해방되는 날이 주말 오후였다. 엄마는 말수가 적었다.
의식이 없는 어머니를 간호하며 난 엄마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옆으로 눕고 싶은지, 귀가 가려우신지, 대소변에 문제가 있는지, 디펜드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지 등을 나는 엄마의 표정으로 파악한다.
젖먹이 아기의 옹알이를 알아듣는 엄마처럼 나는 식물환자인 엄마와 어느 순간부터 눈빛과 표정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 가끔 떠오른다. 어머니와 말로 의사소통이 다시 가능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예전처럼 TV 앞에서 멍하니 있는 시간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엄마는 고단한 워킹맘이고 자신을 위한 시간은 낼 수 없어서 아들과 있는 시간에 말수가 적었을 거라 생각한다. TV를 함께 보며 어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어도 늘어진 자세로 한 공간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는 것만으로 나는 편안하고 좋았다.
어머니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웃는 것을 좋아하셨다. 개그맨 신동엽이나 영화배우 박중훈처럼 입담이 좋고 유쾌한 캐릭터에 호감이 있었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동엽의 “안녕하시렵니까?”에 난 별로 웃음이 나지 않았는데 엄마는 조금도 식상해하지 않고 항상 고개를 상하로 젖히며 크게 웃으셨다.
박중훈 씨가 여러 남녀 가수로 분장하고 립싱크로 노래하며 춤추는 예능 장면에서는 그렇게 행복한 웃음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좋아하시며 포복절도하셨다.
그래서 귀엽고 유쾌한 캐릭터가 TV에 나오면, 부엌에 계신 엄마에게 소리쳐 누구누구 나오니까 빨리 와서 보시라고 알려드렸다. 난 엄마가 세상만사 모두 잊고 아무 걱정 없이 사는 사람처럼 행복하게 웃는 그 얼굴이 참 좋았다.
2층짜리 쌍꺼풀을 가진 엄마의 큰 눈이 하회탈처럼 가늘어지면서 터져 나오는 명랑한 웃음소리를 들으면 나는 일주일 내내 정서적으로 평안하고 행복했다. 그런 엄마의 웃음이 계속 터지게 하고 싶어서 신동엽 씨 같은 캐릭터에 질투를 느끼고 흉내 내며 연구하고 창의적 개그를 고민했다.
그래서인지 난 사람들에게 ‘잘 생겼다’, ‘멋지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귀엽다’, ‘재치 있다’는 말은 종종 들었다. 그 피드백에 무한히 기뻤다. 엄마를 웃게 하는 아들로 완성돼 가는 중이니 말이다.
나는 재밌다고 생각하며 분위기 띄우려고 해준 말에 사람들이 안 웃고 썰렁한 반응을 보이면, 겉으로는 남들 아랑곳하지 않고 내 말에 혼자 웃으며 얼렁뚱땅 넘어가도, 속으로는 ‘살아온 게 이것밖에 안 되는군’ 하는 좌절감(?)에 절망한다.
엄마가 좋아한 신동엽 씨처럼 재밌고 귀여운 캐릭터 따라잡기는 집에서 간호하며 이어갔다. 큰 웃음 한방이 여의찮으면 썰렁 개그 여러 개로 될 때까지 웃기려고 애쓰는 나의 꾸준함 때문인지 집에서 간호할 때 엄마는 종종 웃으셨다.
얼굴 신경에 살짝 미소가 돌면 그 표정이 오래 머문다. 집에서 간호해드리던 어느 날 갑자기 내 썰렁한 개그에 웃으시는 모습 보고 곧 회복되시는 줄 알았다. 그러나 가끔 그런 표정을 보여 주시다가 2004년 초 재활병원에 입원하신 뒤로는 거의 웃지 않으셨다.
이렇게 뇌신경이 손상된 고통 중에도 웃으시는 엄마를 보고 알게 되었다. 원래 엄마 성품은 명랑하고 웃음이 많았는데 척박하기만 엄마의 일상으로 무표정한 그늘만 남고 웃음이 이사가 버렸다는 것을. 난 간호하면서 엄마의 몸 상태뿐만 아니라 웃음이 돌아오도록 지켜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간호하면서 내 속 어딘가 숨은 ‘개그맨의 피 찾기’를 탐구하며 연마했다.
언젠가는 그 큰 눈이 작아지며 엷게 퍼지는 미소에서 폭소로 상승하는 엄마의 시원한 웃음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런 웃음이 돌아올 뿐 아니라 계속 행복하게 웃으시도록 난 재밌고 귀여운 캐릭터가 되려고 주변 사람들을 모르모트 삼아 연구했다.
그 연구는 어머니를 재활병원에 모시고 에세이 작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출판 편집자로 살아가면서 흔적만 남았다. 가장이 되고 보니 호탕하게 한 번 크게 웃는 게 얼마나 어려운 세상인지 알게 된다. 문득문득 무표정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그 옛날 표정 없이 견디던 엄마가 떠오른다.
우리 사회는 필사적으로 애써야만 생존할 수 있는 곳이다. 엄마가 필사적으로 애쓰며 나를 키우신 것처럼 나도 필사적으로 애쓰며 가장 노릇을 해가고 있다. 내 아이들은 여가와 웃음을 늘 누리는 환경이기를 바라면서...
황교진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로 활동.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이며,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