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입원 환자들 회진을 하는데, 70세 여자 환자분이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저에게 걸어오셨습니다. 이 환자는 다발성 뇌경색으로 인한 경도의 치매, 보행장애, 배뇨장애 그리고 감정 조절이 잘 안되는 분입니다. 문제는 소변 문제로 기저귀를 해야 하는데 완강히 거부해서 기저귀를 안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저에게 오시다가 그만 소변 실수를 하셨습니다. 그 환자는 까르륵 웃으며 “오줌 쌌네, 쌌네” 하십니다. 눈치 빠른 간병인과 간호사가 환자가 민망하지 않도록 재빠르게 침대로 모시고 가서 위생 관리를 해드렸습니다. 한동안 웃음을 못 참던 환자분은 조금 있다가 갑자기 훌쩍거리셨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집에 있다고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환자를 잘 달래서 진정시킨 후 병실을 나왔습니다. 그때 뒤에서 다시 환자가 까르륵 웃습니다.
치매는 인지기능 장애뿐 아니라 다양한 신경 행동 증상을 동반하는데 이 중 가장 흔한 것이 감정(Emotion) 장애입니다. 그런데 감정은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의사들은 감정이라는 용어보다는 정서(Affect) 또는 기분(Mood)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용어들은 미묘하게 다릅니다. 정서는 치료진과 같은 제삼자가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모습인 데 반해 기분은 대상자의 주관적인 느낌입니다.
따라서 치료진이 보기에 환자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면 정서 상태는 침울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진이 보기에 침울해 보일지라도 환자 본인이 “즐거워요”라고 말한다면 기분 상태는 긍정적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정서는 환자가 하는 말과는 관련 없이 제삼자가 관찰하는 표정, 행동 등의 비언어적인 객관적 지표를 평가하는 반면, 기분은 환자가 외부에 드러내는 모습과는 상관없이 당사자가 주관적 언어로 표현하는 요소를 평가합니다.
대부분 젊은 나이에 발병하는 정신과 환자의 감정 장애는 정서와 기분이 잘 일치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환자처럼 신경학적 병변으로 인해 정서와 기분이 일치하지 않고 조절이 어려울 때 나타나는 증상을 거짓숨뇌마비(Pseudobulbar Affect, PBA)라고 합니다.
이 용어를 분석하면 Pseudo+Bulbar+Affect이며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뇌간(Bulbar) 질환에 의해 실제 대상자의 감정을 반영하지 않는(Pseudo), 드라마틱하고 병적인 정서(Affect)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신경과적인 증상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로 환자 자신의 기분과 관계없이 갑자기 부적절하게 울거나 웃음을 터뜨리는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과거에는 이 증상을 정서적 불안정(Emotional Lability), 병적 웃음과 울음(Pathological Laughing and Crying), 발작 웃음과 울음(Compulsive Laughing or Weeping), 감정실금(Emotional Incontinence) 등으로 불렀지만, 최근에는 PBA라는 용어를 사용해 뇌질환으로 인한 감정 조절 장애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PBA는 환자와 가족에게 당혹감, 불안감을 유발하며 사회생활에서 위축되거나 고립될 수 있는 중요한 신경 행동 장애입니다. PBA는 뇌간과 연결된 신경 회로인 피질-교뇌-소뇌 회로(Cortico-Ponto-Cerebellar Pathway)에서 발생하는 병변과 연관돼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회로를 구성하는 해부학적 부위의 손상뿐만 아니라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도파민, 글루타메이트, 아세틸콜린 등 신경 전달 물질의 이상도 PBA 발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소뇌는 단순히 운동 기능 조절 및 모니터링뿐 아니라 감정 반응도 모니터링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 부위의 신경회로가 손상되면 감정을 모니터링하고 제어하는 데 문제가 발생해 부적절한 정서를 유발합니다.
이 증상에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s, SSRIs)가 주로 사용되며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고 보고됐습니다(참고문헌 1). 하지만 PBA 치료제로서 정식 승인이 난 것은 아닙니다. 교과서나 논문에 언급되고 있지만, 오프라벨(off-label)로 알음알음 사용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는 기침억제제로 많이 사용되는 덱스터로메토르판 (Dextromethorphan) 20mg과 말라리아 치료제인 퀴니딘(Quinidine) 10mg의 복합제제인 뉴덱스타(Nuedexta)라는 약을 사용할 수 있는데, 이 약은 PBA 치료제로서 유일하게 2011년 미 FDA의 승인을 받았습니다(참고문헌 2). 덱스터로메토르판이 주작용을 하며 퀴니딘은 CYP2D6를 억제함으로써 덱스트로메토르 판의 O-탈메틸화(Demethylation)를 방지하고 약효를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덱스트로메토르판은 N-methyl-D-aspartate 수용체와 Sigma-1 수용체의 길항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수용체들은 감정 표현의 조절과 연관된 뇌간과 소뇌에 주로 분포하며 이 수용체에 작용해 PBA 증상을 완화한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지만 이 약이 기존의 우울증 치료제와 전혀 다른 기전으로 좀 더 병인에 근접한 치료제라고 생각돼 이 환자에게 약을 사용할 수 있는지 여기저기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곧 포기했습니다. 이유는 첫째, 우리나라에서 뉴덱스타는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돼 있어 2018년까지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에서의 수입이 금지돼 있었습니다. 다행히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을 2018년 10월 31일 자로 개정해 환자 요청 시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에서 자가 치료 목적으로 마약, 향정신성의약품 성분 의약품을 수입해 환자에게 공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그 절차가 매우 까다롭고 복잡해 쉽게 구할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가격입니다. 뉴덱스타는 미국에서 한 달 기준 약 60만 원이지만, 한국으로 수입되면 가격이 2~3배 상승해 부담이 큽니다. 덱스트로메토르판을 포함하고 있는 진해거담제가 1달 기준 2~3만 원이고, 퀴니딘이 100mg 기준으로 한 달 4,000원 정도이므로 10mg 기준이면 한 달 400원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두 약물을 섞어 놓은 신약 같지 않은 뉴덱스타는 섞지 않았을 때와 비교해 100배 가까이 비쌉니다. 제 눈에는 일종의 마술이나 사기처럼 보입니다.
제약 회사는 신약 개발을 통해 새로운 약물을 만들고, 이에 대한 특허를 획득합니다. 이것을 일차제약특허(Primary Pharmaceutical Patent)라고 합니다. 이는 물질 자체에 대한 특허이며 일반적으로 20년 정도의 독점적인 권리를 보장합니다. 반면 이차제약특허는 물질 자체에 대한 특허가 아닌, 이 물질의 특정 측면에 대한 특허이며 이에 대한 추가적인 권리를 보장합니다. 예를 들어 약물 전달 방식의 개선, 이전에 허가된 질병의 치료제가 아닌 다른 질병 치료의 추가 허가 등입니다. 특히 다른 질병 치료에 대한 추가 허가는 최근 제약 회사에서 활발하게 시도하는 방법입니다. 이를 약물재창출 또는 약물재활용(Drug Repurposing)이라고도 합니다. 이미 시판해 사용되고 있어 안전성이 입증된 약물이나, 임상시험에서 안전성은 확인됐지만 효능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아 허가받지 못한 약물을 대상으로 새로운 적응증을 규명해 신약으로 개발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제약 회사들은 왜 이렇게 이 방법에 목을 맬까요?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것은 바로 개발 비용입니다. 맨땅에서 신약을 개발하는 것보다 절반 정도의 비용이 든다고 합니다. 물론 신약 개발에 평균 4조 정도의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에, 이 역시 만만치 않은 비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매우 저렴한 편입니다. 두 번째는 이미 시장에서 판매한 약이기 때문에 임상 실험 단계가 단축돼 빠른 시장 진입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는 처음 약을 개발했을 때 연구한 자료를 활용할 수 있기에 성공 확률이 높습니다. 네 번째로 치료가 힘든 희귀질환의 경우 수요가 적어 이 질환만으로 새로운 약물 개발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약물을 활용하면 적은 비용으로도 개발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처럼 갑자기 중대 질병이 발생했을 때 신속한 신약 개발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때는 이 방법을 대안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뉴덱스타의 경우도 오래전에 개발된 특허 만료 물질 두 가지를 결합해 새로운 적응증을 만든 전형적인 약물재창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물건의 원가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처음 개발된 신약은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아주 오래된 물질에서 새로운 적응증을 추가해 가격을 100배 이상 책정하면 먼저 욕부터 나옵니다. 하지만 약물재창출 역시 엄격한 임상 실험을 거쳐야 하며 질병에 따라 부작용이 다를 수 있고 이에 대한 책임 또한 존재하기 때문에, 처음 신약 개발을 할 때와 같은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저는 방문을 닫고 몰래 혼자서 기존 퀴니딘을 10분의 1로 자르고 덱스트로메토르판이 포함된 진해거담제를 사서 이것을 잘 섞어 아주 싸게 환자에게 (몰래)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강렬한 욕망을 참고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인 에스시탈로프람을 처방했습니다. 그래서 환자는 어떻게 됐냐고요? 다행히 환자는 에스시탈로프람으로 증상이 잘 조절돼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어쨌든 이런 약들이 필요한 환자에게 빨리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되면 좋겠습니다.
용어 정리
약물 재창출(Drug Repurposing): 이미 임상에서 실패했거나 시판 중인 약물을 새로운 질병 치료제로 활용하기 위해 새로운 효능을 평가하는 연구 분야. 기존 약물의 안전성이 어느 정도 검증됐기 때문에 새로운 약물 개발에 비해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
참고문헌
1. Pioro EP. Current concepts in the pharmacotherapy of pseudobulbar affect. Drugs. 2011;71(9):1193–1207.
2. Patatanian E, Casselman J. Dextromethorphan/quinidine for the treatment of pseudobulbar affect. Consult Pharm 2014;29(4):264-269.
곽용태
신경과 전문의, 현 용인효자병원 진료부장, 연세대학교 신경과 외래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동대학 석·박사 취득
2000년 세계적인 인명사전인 Marquis Who's Who 등재
2006년 대통령직속 산업의학 발달위원회 전문위원
저서 《치매 부모님이 드시는 약 이야기》, 《담장 너머 치매》, 《우리 부모님의 이상한 행동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