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2004년, 그해 여름
[황교진 에세이] 2004년, 그해 여름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3.09.08 0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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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물인간 어머니 돌본 청년의 이야기

 

2004년 여름은 유독 더웠다. 그 더위는 내게 설렘과 고단함을 함께 안겨 주었다. 그해 5월 초에 김영사와 책 출간 계약을 맺고 두 달 만에 첫 책 《어머니는 소풍 중》이 나와 서점에 깔리고 있었다. 어머니를 간호하며 매일 홈페이지에 쓴 글이 책이 되어 온라인서점 문학 에세이 분야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본 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 부근 서점에 가서 신간 매대 위에 있는 내 책을 슬쩍슬쩍 바라보았다. “누가 내 책 표지를 만져 주기라도 할까”, “사는 사람이 있을까”. 멀찌감치 서서 한참을 관찰했다. 

메이저 출판사에서 편집했지만 출간 전 편집부로부터 대박보다는 공익적 차원의 책이라는 암시를 받았기에 잘 팔릴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그저 신기하고 감사했다.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고 포기하듯 퇴원시킨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와서 8년 동안 24시간 철저하고 절실하게 간호한 어머니와의 사랑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궁금했다.

폭염이 발령된 평일 낮에 조용한 서점 매대를 빙빙 돌았다. 표지에 있는 내 사진을 누가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 겸연쩍었고, 짝사랑하는 대상을 몰래 훔쳐보는 심정이었다. 살짝 이글거리는 눈길을 내 책의 표지에 두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책이 나와도 어머니의 호흡과 생명을 돌봐온 내 24시간은 똑같았다. 안방을 병실로 꾸며놓고 의사, 간호사, 재활치료사 역할을 하다가 장소만 요양병원으로 바뀌었을 뿐, 난 온종일 어머니의 안전과 평안을 걱정하며 간호 물품들을 챙겨 어머니 곁에 다녀올 계획을 짜고 숨 고르기를 했다. 

2004년 초까지 집에서 간호하던 어머니를, 집을 내놓게 되면서 화곡동의 요양병원에 모셔두고 매일 병실에 달려가 씻기고 치료하면서 안정적인 상태가 되도록 도왔다. 내 인생은 대학 졸업 순간부터 여전히 마음대로 계획할 수 없었고 집에서 간호하던 때보다 더 마음이 복잡하고 괴로웠다. 

요양병원의 돌봄 현실이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어머니 돌봄에 대한 내 눈높이를 만족시키는 장기재활병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할 수 없는 것, 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직접 해결해야 했다. 긴 한숨은 마음을 긴장시키고 차분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긴 한숨을 뱉는 데 전화기가 울렸다.

‘MBC 화제집중’, ‘일밤 러브하우스’, ‘KBS 피플 세상 속으로’, ‘인간극장’에서 차례로 출연 요청 연락이 오더니 조선일보에서도 취재 요청이 왔다. 조금 전 외출해서 본 조용한 서점에서의 분위기와 달리 전화기에 불이 났다. 방송국 작가에게 어떻게 나를 아는지 물었다. 지금 연합뉴스 메인화면에 내가 떠 있다고 했다. 컴퓨터를 켜고 들어가 보았더니 큼지막한 배너로 <식물인간 어머니 7년간 돌본 청년의 이야기>가 떠 있었다. 주요 포털사이트 메인 페이지에도 소개되었다.
 
<식물인간 어머니 7년간 돌본 청년의 이야기>

직업과 연애도 포기한 채 식물인간 상태에 놓인 어머니를 돌보고 있는 황교진 씨가 펴낸 사랑의 일기 《어머니는 소풍 중》

『(서울=연합뉴스) 이봉석 기자 = 효(孝)가 점점 사라져 가는 요즘, 건축가를 꿈꾸고 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던 평범한 20대 청년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그의 인생을 '비범'하게 바꿔놓은 사건이 일어난다. 동대문시장에서 도매상을 하던 어머니가 가게에서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진 것. 어머니는 병원을 세 번이나 옮긴 끝에 가까스로 수술받았지만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식 없이 병상에만 누워 있다. (이하 생략) 입력 2004.07.23』
 
35세였던 나는 미디어에 알려진 청년이 되었다. 연합뉴스 메인화면의 내 기사는 무려 나흘 이상 걸려 있었다. 나는 그때 원 소스 기사를 생산하는 연합뉴스의 힘을 실감했다. 온라인 뉴스는 모두 연합뉴스의 이 기사를 가져가 소개했다. 주간지, 월간지 기자들도 쉴 새 없이 전화했다.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는 위험하고 두렵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책임지고 간호한 일이 뭐 그리 큰일이라고 특종이라며 달려드는지 경황이 없었다. 사실 당시에 대한민국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은 흉흉한 연쇄살인 뉴스가 언론을 도배 중이었다. 아마도 끔찍한 세상이 된 현실에서 그에 반하는 따뜻한 미담을 찾던 중에 내 책이 화제가 된 것 같았다. 

기독교 신앙으로 견딘 삶이었지만 청춘의 낭만과 여유를 접고 식사와 수면도 포기한 채, 의식이 없는 식물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는 데만 몰두해 왔다는 사실이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지인으로부터 내 이름이 포털 검색어 1위에 오래 머물렀다는 얘기도 들었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떨리고 괴로웠다. 조용히 어머니를 간호하며, 직업도, 연애도, 쉼도 갖지 못한 진흙 속 삶이었다가 나를 궁금해하며 이야기해 달라는 카메라와 기자들이 달려드는 북새통이 당황스러웠다. 내게 지난 8년간의 일상은 어머니 간호에 최적화한 잔잔한 물결이었지만, 사람들은 큰 파도로 느끼고 있었다.

생방송 하나 정도는 적절하겠다고 생각한 날, KBS <아침마당> 작가에게 연락이 와서 출연에 응했다. 아침 시간에 25분 정도는 마음껏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떨리기보다는 기대감이 앞섰다. 내가 긴장하지 않도록 다정하고 편안하게 진행해 주신 이금희 아나운서가 어머님이 쓰러지시기 보름 전에 처음 찍은 가족사진이 화면에 나올 때 “저 가족사진 보며 매일 많이 울었겠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이 땅에서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마주하지 못할지라도 천국에서 저보다 더 환한 미소로 함께할 어머니를 소망할 수 있는 가족사진을 남겨 주신 것이 보석 같은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 이른 아침에 방청객들의 눈물샘을 적시게 하면서, 나는 유쾌한 일들을 떠올려가며 즐겁게 25분을 채울 수 있었다. 눈물은 8년 전에 충분히 흘렸다. 내게 아픈 일상은 보통의 일상이지만,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눈물을 흘리게끔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범수 아나운서가 대본에 없는 질문도 몇 차례 했는데 신기하게 어떤 질문을 할지 예상이라도 했듯이 적절한 표현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생방송의 기억은 위로와 즐거움이 가득했고, 방송 후 격려도 많이 받았다. 이금희 아나운서는 방송 작가를 통해 내 계좌에 후원금을 보내주었고 내가 보낸 감사 메일에도 답장해 주었다. 지금도 라디오에서 이금희 아나운서 음성이 나오면 삶에 시달리던 피로가 달아난다. 사랑은 그렇게 표현하고 움직이는 데 연속성과 힘이 있다. 꼭 5년 뒤 우리 사회에 존엄사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시기에 나는 아내와 함께 <아침마당>에 토론 패널로 다시 출연했다. 

2004년 여름은 그렇게 대중에게 소개되면서, 식물인간이라는 무시무시한 중환자가 된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드리고 생명을 보존하는 데 청춘을 아끼지 않은 인물로 화제가 되었다. 대학원도 연애도 포기하고 살아가는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기도 응답이고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 모자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 덕분에 중견기업 홍보팀에 특채되어 취직도 했고, 내 인터뷰와 책을 통해 어머니 간호를 돕겠다는 연인을 만나 결혼하여 두 아들의 아빠가 되었다. 

지난 20년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음 이야기에 1997년 겨울의 그날,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춥고 끔찍했던 시작을 회고하며 내게 갑자기 다가온 고통과 내 힘만으로는 견딜 수 없었던 시간을 서술하려 한다. 그날을 이야기하기가 너무 어렵다. 하지만 새로움과 감동의 미래를 얻기 위해서는 아팠던 날을 다시 기술할 필요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이 아픔이 광야의 나침반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고통의 껍데기를 깨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황교진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로 활동.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이며,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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