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입시를 치를 때의 기억
[황교진 에세이] 입시를 치를 때의 기억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3.10.12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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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의 다정다감 에피소드 1

준중환자실에서는 보호자가 직접 간호해야 했고 여의치않으면 간병인을 써야 했다. 간병인이 정해질 때까지 그리고 간병인 휴무일에 내가 간호해야 했다. 간호 초보였던 그 시절 나는 석션을 배우고 체위 변경도 배웠지만 대변을 치우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집에서 나 혼자 케어해야 했던 시간부터 더는 어머니 대소변을 치우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하게 배출하신 뒤 내 손으로 깨끗하게 치우고 새 기저귀로 교체하고 나면 마음 깊은 곳까지 개운해지는 기분이다. 

처음 경희의료원 준중환자실에서 어머니 배변을 보고 당황하여 간호사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쩌지 못하는 수준일 때와는 크게 달라졌다. 간병인은 비닐장갑을 끼고 물티슈로 대충 닦아내지만, 나는 맨손에 물과 비누로 엉덩이 피부가 상쾌해지도록 능숙하게 처리해 냈다. 

오히려 어머니가 변비일 때가 괴로웠다. 중환자의 변비 문제는 어려운 문제다. 나는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았다. 변비 해결과 영양 균등을 위해 어머니께 주식으로 들어가는 뉴케어라는 캔 경관식을 바꿔 보기로 했다. 

하루 여섯 번의 음식 공급 중 절반은 직접 만든 신선한 죽으로 대신해 보았다. 마침 대형 마트가 집 앞에 오픈해서 나는 어머니께 필요한 장을 빠르고 저렴하게 볼 수 있었다. 

시금치, 우엉, 다시마, 멸치, 당근, 쇠고기, 양배추 등의 재료로 보름 정도 드실 수 있는 죽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이 죽을 드시면서 변비 문제가 해결된 것은 물론이고 피부도 좋아지셨다. 

결과적으로 집에서 내 손으로 간호한 뒤 병원에서 들쑥날쑥하던 체온과 혈압이 모두 안정되었다. 대형병원에서 의료진이 못 잡은 바이탈을 비의료인인 내가 케어하며 안정되신 것은 기적이었다. 

병이 낫는 기적은 없지만, 더 편찮으시지 않게 고통이 없게 지키는 기적, 내 마음이 고통을 받아들여 고통으로 느끼지 않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중병이 낫는 기적보다 더 어려운 기적은 마음이 바뀌는 기적이다. 

힘든 일이 힘들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기적, 
용서되지 않는 사람이 용서되는 기적,
웃을 수 없는 순간에 웃을 수 있는 기적,
내일도 여전히 고통스러울지라도 오늘을 치열하게 살며 내일을 소망할 수 있는 기적.
내게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다. 

 

3수생 아들을 사랑한 어머니

고등학교 때 나는 등록금을 기한에 맞춰 내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다행히 등록금 미납 문제 때문에 따로 불러 엄하게 꾸짖는 담임선생님은 없었다. 종례 시간에 등록금 미납자는 얼른 내라는 말씀에 눈치 보는 정도였고, 항상 그 명단에 내가 들어 있는 것에 위축감이 들었다. 

등록금보다 주기가 짧았던 보충수업비 내는 날은 더 곤욕이었다. <수학의 정석>도 다 풀려면 한참 달려야 하는데 보충수업 교재인 <천재수학> 교재를 또 사야 한다는 사실이 동의가 되지 않아 교재 없이 막무가내로 보충수업에 참석했다. 

시험 앞두고 겨우 돈을 모아 교재를 사는, 비효율적인 학교생활을 했다. 내신성적은 좋았지만, 정작 입시에서 중요한 모의고사 성적은 엉망이었다. 

범위가 정해져 있는 과목에서 점수를 얻는 것은 그런대로 목표치를 이뤄냈다. 그러나 범위가 딱히 없는 모의고사에서는 늘 고전했다. 

나는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긴장감과 책임감에 눌려 있었다. 가난과 억압적인 공부에서 벗어나고 싶어 습작 노트를 만들어 감성을 키우는 글쓰기에 집중한 것이 그나마 버텨낸 힘이 되었다. 그 글쓰기의 힘이 내 인생을 이끌어 가는 자양분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셨다. 수험생 뒷바라지 못 하는 당신의 자책감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보란 듯이 명문대에 들어가 안심시켜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잔인한 선지원 후시험 제도하에 전기와 후기 분할 합쳐서 다섯 번이나 떨어졌다. 

3수 한 뒤 전기대에 떨어졌을 때 어머니는 합격 발표장인 K대 운동장까지 처음으로 나와 동행해 주셨다. 나는 전날 ARS로 떨어진 사실을 알고 참담한 마음이었지만 말씀드리지 않았다. 

추가 합격 명단에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2지망 추가합격자 명단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3수할 때 학원비 달라고 하지 못했다. 

혼자서 공부해도 충분하다고 여기고 강남시립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한눈팔지 않고 공부했는데 결국 국어 주관식 답안지에 이름을 쓰지 않은 대형 실수를 저지르고 아슬아슬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그 고독한 3수 시절에 성경 1독을 했다. 가장 절박하고 낮은 자존감의 시기는 나를 기도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그날 K대 부근 썰렁한 카페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엄마가 못해 준 게 너무 많아서 네가 고생만 하는구나” 하며 자책하셨다. 나는 실패를 반복하니 의외로 덤덤했다.

“괜찮아요. 이게 다 제 인생의 약이에요. 후기 분할 모집 대학 중에 잘 선택해서 들어갈게요. 그 길이 내게 더 맞는 길이니까 지금 잠시 돌아가는 거겠죠. 엄마만 힘내시면 돼요.”

어머니는 내가 별로 괴로워하지 않으니, 눈물을 닦고 웃으셨다. 그리고 당시로선 큰돈인 20만 원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또 떨어졌다고 기죽지 말고 겨울옷이라도 따뜻한 거 새로 하나 사 입어. 엄마가 같이 백화점에 가고 싶은데 가게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하니 먼저 집에 갈게.”

“엄마는 참! 대학도 3수씩이나 해서 떨어진 아들, 뭐 잘했다고….”
난 다섯 번째 입시 실패 날, 코오롱의 비싼 패딩을 사 입었다.

후기 분할 대학에 지원서를 낸 후 시험 준비하던 그 겨울에 걸프전이 터졌다. 이번에 실패하면 군대에 가야 하는 위기 상황에서 나는 걸프전에 파병 가서 사막에서 근무하는 앞날이 그려졌다. 

어머니가 선물해 주신 패딩을 보며, 꼭 저걸 입고 캠퍼스를 누비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쉬지 않고 공부했다. 

어머니는 안전한 점수대의 지방대에 가라고 하셨지만, 나는 인 서울의 후기 분할로 뽑는 S대의 이과 전공 중 가장 인문적인 건축공학과에 마지막 기회를 걸었다. 그리고 합격했다. 길고 고단한 문을 넘어 처음으로 이제 조금은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조용하던 가슴이 뛰었다.

고3 겨울부터 세 번의 성탄절마다 얼마나 우울했던가. 진작에 대학생 아들이 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었지만, 어머니는 너무나 기뻐하며 가게 문도 일찍 닫고 귀가해 축하 파티를 열어주셨다. 

서둘러 슈퍼에서 장을 보시다가 손가락이 유리문에 끼어 살이 삐져나오는 큰 부상에도 아픔을 웃음으로 참고 근사한 파티를 준비해 주셨다.

늘 엄마 역할 제대로 못해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내겐 가장 열심히 사시며 인내와 희생을 알려주신 분이다. 어머니의 삶은 내게 사랑의 교과서이고 은혜로운 설교였다. 

나는 그 삶의 메시지를 접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정해갔다. 거듭되는 아들의 입시 실패에도 못났다고 말씀하지 않고 다 자기 탓이라고 하신 그 눈빛, 내가 실수해도 포근하게 안길 품으로 계신 어머니라는 세계는 거칠고 고단한 일상을 부드럽게 바꾸는 영원한 친정이었다.

황교진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로 활동.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이며,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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