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진 에세이] 군 복무를 지날 때의 기억
[황교진 에세이] 군 복무를 지날 때의 기억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3.10.19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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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의 다정다감 에피소드 2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 중에 입대 영장을 받았다. 당시 나는 3수 후 입학했기 때문에 입대 연기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2학년 1학기 개강을 보름 정도 남긴 때 의정부의 보충대에 입소했다. 

평발이었지만 신체검사에서 현역 대상으로 통과되어 행군 훈련 후 발바닥에 큰 상처가 생겼다. 신병훈련을 무난히 받고 퇴소식에서 어머니를 만났을 때 누구나 그렇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광장시장에서 어머니 가게 옆에서 일하시는 분이 훈련소 퇴소식에서 찍은 우리 모자의 포옹 사진을 보고 우셨다고 한다. 

사진 속 엄마의 세련된 머리칼은 삭발이 된 채 병상에 누워 계셨다. 집에서 내가 8년간 간호할 때는 내 손으로 잘 다듬어 정갈한 헤어스타일을 유지해드렸지만, 2004년 재활요양병원에 모신 뒤로는 병원 측에서 머리를 짧게 밀었다. 

병원에서 자주 머리를 감겨 드리지 못하니 두피에 피부병 생기는 우려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나는 어머님이 가장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는 간호 노하우를 알아도 곁에서 매일 돌보지 못하는 고통에 답답한 마음을 누르고 직장에 다녔다.
 
몰라서 답답한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알고 있는 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참아야 하는 답답함이다. 신앙의 힘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했다. 믿음은 곧 의존이다. 

내가 무기력할 때는 의존만이 유일한 답이지만, 내가 ‘중환자 간호에 최고인 알고 있는 바’를 내려놓고 의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 ‘최고인 알고 있는 바’가 자부심이다.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교만할 수밖에 없다. 객관적이고 넓은 배려, 자기 부족 인식, 다양성 수용,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겸허함을 상실한다. 

자부심이 상당하면서 겸허함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팬덤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 주변에 최고라고 하는 찬사만 쏟아지는 중심에 놓여 있는 사람, 그런 팬덤과 찬사를 일부러 만들어 놓고 자위하는 사람 등 모두 자부심이라는 어둠의 틀에 둘러싸여 가짜 확신과 신념을 지니고 산다.

내가 욕창과 폐렴 없이 깨끗하고 안정적인 상태로 어머니를 간호해 온 자부심을 버리지 않고 간호사와 간병인과 마찰을 일으켰다면 나는 병원에서 블랙컨슈머 보호자로 찍혔을 것이다. 

어머니 간호해 드리러 병원에 도착할 때마다 다짐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더 낮아져야 한다고. 어머니 병상에서 무수한 당혹스러움과 디테일이 부족한 케어를 봐도 간호사님과 간병인께 “수고 많으셨죠? 어머니 보살펴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인사만 드린다. 내 눈높이를 낮추지 않고 주장하면 대한민국에 어머니를 모실 병원은 한 군데도 없다. 

다행히 욕창과 폐렴 없이 장기간 케어한 내 눈높이는 현실적으로 조율되었고, 어머니 케어도 이 이상 해줄 수 있는 병원은 없다고 인정한 병원에서 마지막 9년을 보냈다.  

집에서 8년간 24시간을 함께 있다가 재활요양병원에 모시고 병원에서 할 수 없는 케어를 보충해 가며 지낼 때 나는 하나뿐인 아들 군대에 보내 놓은 엄마 심정이 자주 떠올랐다. 

어떠셨을까?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마산 부림시장 대형화제 사고로 가게가 소실돼 경상남도 남지의 외할머니 집에 나를 맡겨 두고 상경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서울 현저동의 달동네로 이사한 부모님과 같이 지낼 수 있었다. 

서대문 영천시장에서 장사하시는 어머니 얼굴을 제대로 볼 날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고등학교 때 수업료와 보충수업비, 참고서 값을 제대로 주지 못하여 몰래 많이 우셨다. 

재수, 삼수할 때 수험생 뒷바라지 못해 자꾸 대학에 떨어지게 했다고 미안하다며 펑펑 우신 모습은 지금도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 아들 군대 보내 놓고 퇴소식에서 만날 때 얼마나 가슴이 저미셨을까. 시간이 지나니 병상의 어머니를 보는 내 마음이 꼭 그랬다. 

집에서 매일 씻기고 영양죽을 만들어 호스에 넣어 드렸던 어머니, 요양병원에서 짧은 머리에 시간이 지나면서 앙상해지는 팔다리 보면서 엄마의 마음을 조금씩 느껴갔다.

어렸을 때 1년에 한 번 명절에 나를 보러 내려오시면 외할머니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말 안 듣던 일들부터 엄마에게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1년 만에 만나는 아들에게 매부터 드셨다. 

돌아보니 그건 할머니 말 안 들어 때린 매가 아니라, 옆에서 돌봐 주지 못한 현실에 대한 자책과 속상함이었다. 나는 1년에 한 번 만나는 엄마에게 왜 맞는지 모르고 호된 매를 맞으며 서럽게 울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라면서 우울질 기질이 형성되었다. 별로 말이 없고,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말로 직접 대화하는 것보다는 글을 쓰는 걸 더 좋아했다. 

전화받는 걸 두려워한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내 얘기 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가장 힘들어 한 대중 강연을 종종 하며 살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다. 

사춘기 때 빚쟁이들이 집에 전화 걸어 부모 바꾸라고 할 때, 계셔도 안 계신다고 말해 놓고 그 어른들에게 욕을 자주 먹었다. 그때는 내가 가난한 우리 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화로 욕먹어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좋은 대학에 가서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싶었고, 선지원 후시험 제도의 가혹함에 밀려 입대 영장 나오기 직전에 뒤늦게 입학한 뒤 감사하게도 선교단체의 겨울 신앙수련회에서 내 자아의 깨어진 모습을 마주했다. 

5년이나 신앙 생활해 오며 만나지 못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2학년부터 새로운 자아로 캠퍼스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겨울방학 중 통보받은 입대 날짜를 연기할 수 없었다.

1992년 2월 18일, 겨울방학 중에 씩씩하게 군 선교를 하겠다며 입대했다.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나는 군 복무 별거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짧게 자른 머리를 들이대며 상처 땜통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키워주어 고맙다고 하고 활짝 웃으며 입대했다. 

어머니는 의정부에서 돌아가시던 차 안에서 펑펑 우셨다고 한다. 며칠 후 입대할 때 입은 옷과 신발을 꼭꼭 싸서 보낸 소포를 받으실 때 또 많이 우셨다고 한다. 

소포 쌀 때 교관이 절대로 편지나 쪽지 같은 거 써넣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나는 종이를 찢어 잘 있다고 걱정 마시라고 짧게 적어 넣었다.

훈련소에서 6주간의 신병훈련을 받는 동안 어머니께 받은 편지다.

“사랑하는 아들,
엄마는 아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들 받는 과외 한번 받지 않고
끼니와 건강 문제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며
길고 어려운 기간 헤쳐와 대학에 들어갔던 일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어.
아들은 지금까지 잘해 왔듯이 앞으로도 잘해 낼 거라 믿는다.”

군 복무 기간 내내 엄마의 편지가 버팀목이 되었다. 
천국에서 우리 모자는 사진의 모습처럼 포옹할 것이다.
아무 말도 못 할 것이다. 그저 눈물만 흐를 것 같다.
이 땅에서 수고한 삶을 뜨거운 포옹 하나로 다 보상받을 것이다.

황교진
<어머니는 소풍 중> 지음. 20년간 식물 상태의 어머니를 돌보며 출판편집자, 작가, 강연가로 활동. 
중환자 가족을 돕는 소셜벤처 <실버임팩트> 대표이며,
창업가의 경험으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는 <비전웍스벤처스>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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