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나이 드는 시니어, 유영미 전 SBS 아나운서
아름답게 나이 드는 시니어, 유영미 전 SBS 아나운서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4.01.02 10: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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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아닌 나무로 살아온 여성 아나운서의 은퇴 후 일상
SBS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아나운서 겸 피디로 재직 시절 / 유영미 제공
SBS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아나운서 겸 피디로 재직 시절 / 유영미

 

유영미 아나운서는 SBS 개국멤버이면서 여성 아나운서 최초로 정년을 맞아 은퇴했다. 유 아나운서에게는 다양한 ‘최초’ 기록이 있다. 출산 이후 뉴스앵커로 복귀한 최초의 여성 앵커, 최초의 여성 스포츠캐스터,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사회 공익부문을 수상한 최초의 아나운서.

1986년 울산MBC 아나운서로 입사해 방송을 시작했고 1991년 SBS 개국멤버로 합류해 콘텐츠전략본부 아나운서팀 부장을 거쳐 부국장에 오른 뒤 2022년 3월에 정년퇴임했다. SBS 최초로 정년퇴직한 여성 아나운서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여성 아나운서 중 가장 오랫동안 뉴스를 진행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여성 앵커라는 경력은 후배 여성 아나운서들에게 빛나는 발자취다. 지금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여성 아나운서는 결혼하거나 애를 낳으면 그만둬야 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시절, 여성 아나운서를 잠깐 피었다 지는 꽃으로 여길 때 누구보다도 그런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며 자신의 길을 개척한 이가 유영미 아나운서다.

유 아나운서는 1993년부터 2011년까지 18년간 〈뉴스 940〉, 〈뉴스와 생활경제〉, 〈12 뉴스〉 등 쉬지 않고 여러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심지어 임신 9개월일 때도 방송 일을 놓지 않았다. SBS 라디오 최장수 진행자 중 한 명으로 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1994년부터 2021년까지 진행했다. 노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진행하면서 노인 문제에 대해 공부해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노인학 석사를 받았고, 라디오 진행 경험을 바탕으로 《두 번째 청춘》이란 책을 써냈다.

여성 최장수, 최고령 앵커의 꿈을 이루고 정년퇴임한 지 1년 9개월쯤 흘렀다. 자기 인생을 자유롭게 설계하고 있는 유 아나운서에게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젊은 생기가 폴폴 넘쳤다.

 


 

1. 요즘 건강하신지요? 근황은 어떠신지, 그리고 아나운서님의 건강 비결, 동안 비결이 궁금합니다.

건강은 그럭저럭 유지되는 듯합니다. 특별히 전념하는 운동은 없고 그저 동네 야산을 가볍게 오르고 있어요. 정년으로 퇴임하자마자 (사)한국아나운서클럽 사무총장을 맡아 봉사하고 있습니다. 늘 일복이 많았는데 마냥 쉬는 것은 제 체질은 아닌가 봅니다.

방송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극동방송 <길가에서 만난 예수>란 프로그램을 토요일 오후 3시에 하고 있어요. 대한민국 선교 역사와 선교사 이야기를 테마로, 일제강점기의 우리 아픈 역사와 이를 도운 감동적인 선교사의 발자취를 소개합니다. 때때로 스피치 강연과 시니어 관련 유튜브 방송도 하고 있고요.

 

2. 은퇴하셨지만 살아오시며 하던 일은 조금씩이나마 연장하고 계시네요. 일을 완전히 떠나는 것보다는 취미처럼 이어가는 것이 은퇴 후 건강 비결로 보입니다. 특별히 요즘 기쁜 일, 행복한 일은 무엇인가요?

매일 출근하지 않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특히 아침 날씨가 비바람치고 폭설로 교통이 마비된 날은 “내가 지금 새벽 방송이라면 얼마나 난감할까?” 외치며 ‘후배들아, 고생하겠구나’라고 혼잣말을 합니다. 하루 24시간을 내가 마음껏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방송 일을 하느라 못하던 작은 취미생활을 찾아서 하고 있습니다. 시도 쓰고, 옷 만드는 것도 배우고, 요리도 하고, 노래도 배우고, 여행도 가고요. 친구들과 좋은 카페를 탐방하며 수다도 떨고, 컨디션 안 좋은 날은 집에서 뒹굴뒹굴하는 자유시간을 만끽합니다.

 

3. 고등학교 시절 황인용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듣고, 신은경 KBS 앵커의 뉴스를 보며 아나운서의 꿈을 키우셨다고요. 십 대 시절 품었던 꿈을 이루고 SBS 개국멤버로 합류해 프리랜서 선언 없이 정년퇴임을 하셨습니다. 그 소회는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미래를 꿈꾸던 10대였어요. 20대에 방송사 입사 시험에 몇 번 떨어지며 아나운서 꿈을 포기하고 좌절할 수 있었는데, 제게 아나운서 꿈을 이어갈 힘을 주신 분이 어머니였어요. 항상 저를 위해 기도하셨죠. 엄마의 기도로 떨어질 때마다 일어설 힘을 얻고 불가능하게만 보인 산에 다시 올라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어요.

SBS 개국 후 당시 여자 아나운서로서는 불가능하게 보이던 아줌마 앵커, 최장기 앵커, 동계올림픽 최초 여성 캐스터 등 빛나는 일들을 해냈고, 고품격 시니어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27년 동안 아나운서로, 그중 10년은 아나운서 겸 피디로 일하면서 시니어 공부를 자연스럽게 한 것이 제게는 인생을 폭넓게 바라보는 계기가 됐어요. ‘SBS 최초 정년 여자 아나운서’ 믿기지 않는 타이틀을 얻은 것이 제게 큰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라디오 진행 모습 / 유영미 제공
라디오 진행 모습 / 유영미

4. 입사하실 때 어떤 아나운서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아나운서 채용 심사위원이 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 꿈도 당당히 이루셨는데요. 최초라는 타이틀과 함께 여성 아나운서의 편견과 맞서 싸우신 선배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성 아나운서는 화려해 보이는 뉴스앵커 자리에 앉아도 잠깐 일하다가 밀려나는 게 다반사였죠. 힘들게 회사에 들어왔어도 ‘결혼한 여자가 회사에 들어왔다’고 미워하는 선배들도 있어 3년 동안 아이를 갖지 않았어요. 그 뒤에 임신 9개월 차까지 뉴스앵커를 했어요. 내가 버티고 잘 해내야 후배들도 아무 문제 없이 일할 거란 책임감이 컸어요.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에서 피겨와 컬링 종목을 제가 중계했는데, 제가 스포츠캐스터로 활약한 당시까지 여성 캐스터가 없었어요. 지금은 여자가 스포츠캐스터를 한다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그땐 처음 맡은 자리라 죽을힘을 다해 방송했어요. 여자들은 빨리 회사를 나간다고 안 시켰거든요. 그 분야는 남자 선배들 거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여자가 하려고 하면 "너네는 금방 그만둘 건데 왜 하냐", "예쁠 때 예쁜 프로그램이나 해라"라는 편견이 있었죠. 눈물 흘려가며 일하면서도 그걸 해냈을 때의 성취감은 말할 수 없이 컸어요.

여성 아나운서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전문성을 키워도 ‘여성’일 뿐이었죠. ‘꽃’으로 주목받을 때는 좋죠. 그러나 어느 정도 경력과 실력을 쌓아 ‘뿌리 깊은 나무’가 되고 싶은데 “네 태생은 꽃이야!”라고 규정할 때 가슴이 안타까웠어요. 한국과 주변 국가로 올수록 여성 앵커가 젊은 편이에요. 경력보다는 뉴페이스를 선호하죠. 여성 앵커도 오래도록 일할 수 있다는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었어요.

 

5. 그래서 한국의 마거릿 대처가 되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군요.

주어진 일들이 너무 버거울 때 따로 의논할 상대도 없고 또한 의논한다 한들 별다른 수가 안 보일 때 마거릿 대처의 영화를 보면서 위로를 받았어요. 혹독한 정치판에서 자신의 반대파 앞에 당당하게 걸어가 맞서는 모습이 감동이었어요. 철의 여인, 그녀가 걸어간 길에 비하면 저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힘을 내자! 다짐했죠.

 

6. 2022년 3월에 퇴직하실 당시 마음은 어떠셨는지, 그리고 은퇴 후 어떤 꿈과 계획을 세우셨는지요?

재직 시 너무 많은 일을 하고 바빴기에 퇴임하면 자유롭고 편안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막상 은퇴하니 편하지만은 않고 오히려 혼란스럽더군요. 퇴직에 앞서 자기 인생을 돌아볼 시간적 여유가 필요해요. 정년을 앞둔 분들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자기 삶을 성찰할 시간을 주고, 정년 후 인생 설계를 구체적 실질적으로 한 뒤 은퇴와 더불어 새롭게 시작할 마음을 챙기시라고요.

 

7. SBS 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27년이나 진행하셨는데요. 노년층 대상의 장수 라디오를 진행하시면서 노인 문제를 공부했고 책도 내며 우리 사회의 시니어분들과 친밀할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노인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바뀌어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10여 년 전 노인학을 공부하면서 제가 방송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노인 문화 바꾸기’였어요. 그래서 오랜 기간 노인 대상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건강하고 활기찬 노년’을 핵심 테마로 잡았어요. 노인에 대한 차별적인 의식과 거부감을 갖는 세태가 답답했고 그것을 바꿔보려고 열심히 방송했죠.

노인을 초라하게만 바라보니까, 다들 늙고 싶지 않은 거예요. ‘늙는 것 괜찮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해요. 아직 세상에 기여할 일이 많은 근사한 노년이 될 수 있다는 걸 방송에서 소개했죠. 어린이 방송을 편성하는 것처럼 시니어 방송도 방송사에서 책임져야 하는 시대가 이미 지나고 있어요. 나이 들어서도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 보고 노인은 늙고, 초라하며, 무능한 존재라는 선입견을 없애야 해요.

어르신들은 정이 많으셔서 진심을 다해 방송하면 편지도 보내주시고, 선물로 새해엔 세뱃돈까지 보내주신 분도 계셨어요. 지금은 유튜브 채널 <영미티비>를 운영하면서 은퇴 이후의 일상과 치매예방학교, 멋진 시니어의 삶을 공유하고 있어요. 은퇴 후에도 전문성과 여유를 겸비한 흰머리의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길을 걷는 게 꿈이에요. 멋있게, 아름답게 늙어 가는 노년으로 살면서 스스로 인생의 행복을 경험하고 싶어요.

 

8.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환갑이란 나이를 지나오실 때 마음이 궁금합니다. 나이 50세면 지천명이라고 하지만 60세가 되어도 우리가 하늘의 뜻을 안다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환갑은 육십갑자가 한번 돌았다는 뜻이죠. 60부터는 두 번째 청춘, 세 번째 스물입니다. 내가 진짜 인생의 갑이라는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에서는 환갑을 노년 세대 진입이라 하지만, 그것은 숫자만 의식하는 계산일 뿐, 당사자는 더욱 새롭게 100세 시대를 맞이해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디지털 시대를 누리고 배우며 살아야 해요. 

 

9. 《두 번째 청춘》 책에 ‘날마다 새로운 꿈을 꾸고 왕성한 호기심을 가지며 현재를 즐기려는 마음가짐’을 노년기 중요한 덕목으로 말씀하셨는데요. 나이 들었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법으로 말씀해 주실 것들은 무엇이 있나요?

은퇴는 가장으로서 직장과 자녀에 대한 책임감에서 벗어나는 시기에요. 건강과 재정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면 온 세상을 누비고 다닐 수 있는 스마트한 자유세대라고 생각해요. 외국어 공부도 도전하고 구글링도 배워서 휴대폰 하나만 가지고 나가도 어디서든 친구들과 놀 수 있는 배짱을 가지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시간을 두고 성취할 수 있는 일, 예술과 가까워질 수 있는 취미생활을 하면 시간도 즐겁게 가고 성취감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10. 요즘 아나운서님 자신을 위해 즐겨보시는 프로그램, 취미, 취향은 어떤 것이 있나요?

가끔 내가 아나운서 맞나? 싶을 때가 있어요. TV는 잘 안 봅니다. 라디오도 잘 안 들어요. 평생 그쪽 일을 해서 궁금한 게 별로 없어요. 오히려 동네도서관에 가서 보고 싶던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요. 이런 자유가 제겐 큰 행복이에요. 세상은 항상 번잡하고 늘 정당끼리 싸우고 미디어는 시청률 경쟁을 하며 오히려 국민의 건강한 정서를 해치는 면도 있죠. 중요한 뉴스는 선택해서 짧게 보는 것이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방법이에요.

 

SBS 아나운서 부장 시절 프로필
SBS 아나운서 부장 시절 프로필 / 유영미

 

11. 얼마 전 인기 강사가 강연 중에 치매 검사받은 얘길 소개하면서, 초로기치매, 브레인포그 등이 화두입니다. 아나운서님은 치매에 대해 평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요? 

정도의 차이가 있어도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인지장애가 오죠. 치매에 대한 전 국민 대상의 홍보와 교육이 절실하다고 봐요. 단, 두려움과 공포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여정에서 피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예방과 함께 치매와 치매가족에 대한 배려, 공감, 현실적인 도움이 무엇이 있는지 고민하고 같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12. 앞으로의 꼭 하고 싶으신 것과 2023년을 지나며 감사한 일, 2024년 소망하시는 일은 무엇인가요?

매일매일 방송하는 뉴스 때문에 휴가도 마음대로 못 쓰며 일해 왔어요. 딸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6학년까지 운동회에 딱 두 번 겨우 참석했죠. 가족과의 시간을 여유롭게 가질 생각이에요. 아나운서로 정년까지 일한 지난날에 깊이 감사해요.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적당히 일하고 자유롭게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요즘이 나쁘지 않아요. 특별한 계획보다는 하루하루 즐겁고 스트레스받지 않는 루틴으로 사는 것이 신년 소망이라면 소망이에요.

 

13. 치매 공감 전문 채널이며, 시니어층의 건강과 행복을 다루는 디멘시아뉴스에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은?

암보다 무서운 질병이 치매라고 하죠. 치매가 국민에게 공포로만 각인된 질병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치매와 치매 가족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일반인들에게 공감을 불어 넣도록 지금처럼 애써주시길 바라고, 치매 가족을 위하는 치매 전문 채널로 널리 인식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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