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미 칼럼] 누구를 위하여 스마트한 제품들이 있는가
[유영미 칼럼] 누구를 위하여 스마트한 제품들이 있는가
  • 유영미 전 SBS 아나운서
  • 승인 2024.07.29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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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디자인은 어디에...

“노인 인구만 늘어나서 큰일이야.”
“역대 최저 출산율이래. 요즘 세대는 결혼에 관심이 없어.”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앞으로 존속하겠니?”

요즘 크고 작은 모임에 참석하면 흔히 나오는 이야기다. 내 또래의 신중년들은 정년퇴임을 해도 마음이 무겁다. 우리 세대는 극심한 가난과 6.25 전쟁을 겪은 부모님 세대에 비해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교육 받고 좋은 직장을 구한 혜택받은 세대라고 사회학자들이 말한다.

주말마다 무슨 예식은 그리 많은지! 그 불편한 정장을 차려입고 축하객으로 축의금을 들고 가지만 이 신혼부부들이 아기도 많이 낳아 줘야 하는데 하는 걱정이 앞서지만 어디 어른들 마음처럼 되는가. 결혼식장도 요즘은 멋있고 세련된 곳이 많아 눈이 휘둥그레져 두리번거리는 촌티를 낼 때도 종종 있다.

대학 동창의 아들 혼사였다. 그 집 남편이 좀 잘나간다더니 어느 정도 재산가가 되어 좋은 장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동창들이 많이 왔고 오랜만에 반갑고 시끄러운 인사들도 오갔다. 예식은 곧 시작되는데 친구 한 명이 안 보여서 은근히 신경이 쓰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화장실에 갔다가 물 내리는 곳을 찾지 못해 엄청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옆에서 다른 친구가 거든다. “너도 그랬니? 나도 이것저것 누르고 찾느라 짜증 나서 혼났어”라고.

조금 웃픈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누군가. 한때는 남들이 부럽다는 커리어우먼에 자기 전문직에 나름의 프라이드를 갖고 살아온 스마트한 친구들인데, 어느새 무대는 후배들에게 다 내주고 그 잘난 화장실 물 내리는 곳을 한 번에 찾지 못해 우물쭈물하다니!

나이 탓할 것 없다. 요즘 ‘1일 1 스케줄’ 원칙으로 산다. 점심 약속이 있으면 그것 하나로 족하고 늦은 저녁까지 이어지는 행사는 사양하는 편이다. 점심을 결혼식 음식으로 먹어서 그런지 저녁은 가볍게 깔끔한 오이지랑 흰밥을 먹고 싶었다. 최근에 값 좀 나가는 좋은 밥솥을 하나 마련했는데, 이유는 이제 밥 그만 사 먹고 밥해 먹는 가정적인 엄마가 되고 싶은 이유도 살짝 있어서다. 그런데 새 밥솥이 너무 스마트한 것이었다. 도대체 스위치는 어디 있는지 찾기도 어렵고 눈은 잘 보이지도 않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 여기저기 더듬거리다가 갑자기 짜증이 확 몰려왔다.

도대체 왜 이렇게 디자인한 걸까? 그저 아름답기만 하고 실용성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소비자에게 몹시 불편을 주니 못생겨 보이기까지 한다. 투자한 돈이 있으니 쉽게 갖다 버릴 수는 없고, 제품을 만든 회사에 묻고 싶다. 돋보기를 써야만 겨우 작은 글씨가 보이는 노안의 시니어들은 스마트 밥솥을 쓸 권리도 없냐고! 차라리 디자인을 조금 포기하고 쓰기 편리한 스마트 제품을 더 많이 출시할 순 없냐고!

난 실용주의자다. 순수 예술이 아닌 분야라면 생활에 편리함을 주는 방식을 좋아한다. 제품 하나 사서 치매 예방을 위해 머리 쓰는 것 같은 놀이는 굳이 하고 싶지 않다. 이런 현실에 손끝이 둔하고 동작도 느슨해진 고령의 어르신들은 세상 살기가 얼마나 어려우실까? 전자 제품 하나를 사도 기존 방식이 아닌 늘 새로운 방식으로 써야 하니, 노인들이 구닥다리 제품을 그대로 쓰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루 한 주먹의 약을 드시는 노인들은 그 많은 약봉지에 적힌 깨알 같은 부작용을 어떻게 읽을까? 신축건물 주차장으로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인·아웃 표시는 왜 그리 작고 눈에 안 띄게 해놓은 걸까? 그것이 새로운 스타일의 앞서가는 디자인인가? 고급 레스토랑 불빛은 왜 그리 어두컴컴해서 맛난 고급 음식이 잘 보이지도 않게 하는가? 노인을 위한 나라, 노인을 위한 디자인은 없다.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은 그 무엇에도 제한을 두지 않는다. 나이, 성별, 장애, 국적 및 언어를 넘어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으로 사용자에게 편리함과 편안함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노안이 와도 귀가 어두워져도 보행이 힘들어도 아무 불편함이 없도록 한 디자인이다.

무장애(Barrier-free)는 일반 사용자와 장애인 모두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디자인이나 시설을 가리키는데, 유니버설 디자인은 배리어프리보다 나아간 개념이다. 단순히 모두를 위한 편의성이 가미된 디자인을 넘어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가 더해졌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 초반에 유니버설 디자인 개념이 들어왔지만, 그 필요성이 확산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있다. 그러나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은 일찍이 유니버설 디자인 개발에 착수했다. 1997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디자인 센터는 유니버설 디자인 7원칙을 마련했다.

1. 공평한 사용(Equitable Use): 다양한 능력의 사람들에게 유용하고 마음에 들도록 디자인
2. 사용상 유연성(Flexibility in Use): 개인 선호나 장애, 능력과 관련해 넓은 범위에 맞출 수 있도록 디자인
3. 간단하고 직관적인 사용(Simple and Intuitive Use): 사용자의 경험이나 지식, 언어, 집중도와 무관하게 이해하기 쉽도록 디자인
4. 알아챌 만큼 충분한 정보(Perceptible Information): 사용자의 감각 능력이나 환경 조건과 무관하게 사용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디자인
5. 실수를 감안(Tolerance for Error): 사용자가 잘못 쓰거나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하더라도 위험이나 역효과를 최소화하도록 디자인
6. 적은 물리적 노력(Low Physical Effort): 사용하기 편하고 피로가 줄도록 디자인
7. 접근하고 사용하기에 적절한 크기와 공간(Size and Space for Approach and Use): 사용자의 체구, 자세, 이동성과 무관하게 접근하고 사용하기 편하도록 크기와 공간을 디자인

즉, 유니버설 디자인의 핵심은 ‘쉽고 편리함’이다. 다양한 환경에서 공평한가, 간단하고 직관적인 사용법으로 정보 습득이 용이한가, 위험에 대한 예방책이 있는가, 사용하기 편리한가, 누구에게나 접근이 가능한가 등이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선 대한민국은 이제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노인이다.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33년 70세 이상은 1천만 명, 2050년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1천891만 명이다. 생산성과 경제성을 따져 비합리적이라고 공공시설과 제품개발을 축소하는 것은 노인 인구 증가세에 역행하는 모습이다. 편리하고 안전하고 쾌적한 디자인은 인간에 대한 배려다. 일부 세대를 위한 미적 탐구로 다른 세대에게 불편함과 불안함을 가중한다면 ‘모두를 위한 제품’의 세밀함과 세심함에서 멀어진다.

괜히 최첨단의 예쁜 전기밥솥 하나 사서 복잡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음식점 키오스크(Kiosk)가 어려워 주문을 못하고 나오는 시니어가 되지 않게 노력하며 살겠으니,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뛰어난 디자이너들은 그대들의 재능을 시니어 세대를 위해 펼쳐주길 당부한다. 최고의 밥맛은 역시 집밥이다. 스마트한 유니버설 디자인 밥솥은 신혼부부만이 아니라 황혼부부에게도 “밥은 항상 사랑이고 진심”임을 짚어 줘야 하지 않을까.

 

유영미
전 SBS 아나운서
서울사이버대학교 성악과 재학 중
현 사단법인 한국아나운서클럽 사무총장
SBS 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27년 진행
<SBS 뉴스와 생활경제> 최장기 앵커

《두 번째 청춘》(나이 들수록 더 행복하고 더 우아하게 사는 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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