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경 칼럼] 나는 외할머니 손에 컸습니다
[신은경 칼럼] 나는 외할머니 손에 컸습니다
  • 신은경 전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 승인 2024.07.0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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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을 땅에 묻고, 딸과 네 손주를 위해 산 정난화 할머니

나와 세 동생은 외할머니 손에 컸다. 엄마가 직장에 나가셔야 해서 외할머니가 도시락을 싸 주셨고 운동화를 빨아 주셨고, 방 세 개의 연탄불을 갈아 주셨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쪽 찐 머리를 고수하셨다. 숱은 그리 많지 않으셨지만, 참빗으로 긴 머리를 곱게 빗어 뒤로 모으고, 오른쪽 둘째손가락으로 긴 머리를 돌돌 말아 은비녀를 꽂으셨다. 말이 은비녀이지, 어린 손주들이 깨물었는지 끝이 상처투성이 비녀였다. 그 긴 머리를 빗고 나면 떨어진 머리카락을 소중히 모아두셨다. 그걸 뭐에 쓰시나 보았더니, 반짇고리 속 바늘꽂이를 만드는 데 사용하셨다. 딱딱한 마분지를 동그랗게 잘라 헝겊을 씌우고 그 위에 머리카락을 뭉쳐 헝겊으로 싼 동그라미를 서로 연결한다. 여기에 바늘을 꽂으면 녹이 슬지 않아 좋다고 말씀하셨다.

외할아버지는 한의사였다. 왕십리에 문을 연 한의원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없지만, 나중에 가족들에게 전해 들은 얘기로는 그 사랑방에 돈도 안 되는 동네 사람들이 종일 와서 놀고 가기 때문에 외할머니가 속을 많이 끓이셨다고 했다. 그래도 그 사람들 먹을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 대접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는 구로동으로 이사하셨다. 나는 외할머니댁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엄마하고 방문했다가 돌아올 땐 하룻밤 자고 오는 허락을 받고 할머니 집에 남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저녁밥을 배불리 먹었다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늘 간식(?)을 준비해 놓으셨다. 밥주발 하나에는 배추김치 이파리에 밥을 싼 동그란 경단, 그리고 또 하나엔 김으로 싼 동그란 밥 경단 하나. 그렇게 주발 두 개를 아랫목 요 밑에 넣어 두었다가 늦은 밤 출출하지 않냐고 하며 꺼내 주셨다. 그 밤까지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같이 들었다. <전설 따라 삼천리>라는 귀신 얘기가 나오는 방송이었다. 시그널 음악은 아름답기 짝이 없는 <En Bateau(조각배로)>라는 드뷔시의 곡이었는데, 지금도 플루트 연주로 시작하는 이 곡을 들으면 이어져 나올 귀신 이야기로 몸이 떨리곤 한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쯤 할머니는 구로동 집을 정리하고 우리와 함께 사셨다. 우리가 화곡동에 큼지막한 이층집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외할머니댁에서 자고 가겠다고 떼쓰지 않아도 되었다.

할머니는 늘 내 편이었다. 어려서 밀가루 음식을 싫어한 나는 칼국수를 하는 날이면 걱정이 앞섰다. 엄마가 정성껏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밀대로 넓적하고 둥그렇게 만든 반죽을 몇 번 접어 가지런히 썰어 국수를 끓여 주셨는데, 내겐 풀죽 같은 뜨겁고 걸쭉한 밀가루 국수 국물이 정말 싫었다, 함께 들어간 호박이며 국물이 빠진 멸치까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상 밑에 숨겨둔 찬밥을 살짝 내 앞에 올려 주셨고, 상 끝에 앉아 밥을 먹던 나는 기어코 아버지께 들켜 혼이 나고 말았다. 엄마가 정성껏 준비하고 요리하신 칼국수를 먹지 않고 무슨 일이냐고.

할머니는 생활의 지혜를 많이 알고 계셨다. 딸꾹질이 멈추지 않으면 큰 대접에 찬물을 담고 젓가락 두 짝을 십자로 걸쳐 놓아 마시게 하셨다. 네 부분으로 나뉜 대접의 물을 하나, 둘, 셋, 넷 세며 돌려 가며 마셔야 한다. 숨을 쉬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젓가락 없이 그냥 네 번 물을 마시면 안 되나요?”라고 물었지만, 나중에 실험해 보니 그냥 네 번 물을 마시면 딸꾹질은 정말 멈추지 않았다.

네 아이의 도시락을 싸는 일은 할머니의 큰 임무였다. 다 먹은 빈 도시락을 저녁때 내놓아야 설거지해서 아침에 밥을 싸 주는데, 깜빡하고 도시락을 꺼내 놓지 않는 아이가 하나라도 있으면 바쁜 아침에 소동이 난다.

김치는 조그만 병에 담고 라면 봉지에 넣어 주셨는데, 국물이 새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가방을 세워 들어야 한다. 만원 버스를 타고 누가 내 가방을 받아 주며 가방을 눕히는 순간 국물이 흐를까 봐 두려움에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광화문에서 버스를 내려 효자동 학교 앞까지 또 한 번 버스를 타야 했다. 흰 운동화가 밟혀 신발 자국이 나고, 도시락 반찬 국물이 흐르기라도 할까 봐 광화문부터 효자동까지 늘 걸어 다녔다.

내가 대학에 잘 들어가고 싶었던 이유는 온전히 엄마와 외할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떨어졌다. 겁을 먹고 하향 지원했는데도 떨어졌다. 외할머니와 엄마의 기를 살려드리지 못했기에 불합격 소식을 들은 그날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기죽은 모습의 나를 본 할머니가 더 슬퍼하셨을 것이다.

엄마는 내가 재수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2차 대학을 선택했다. 첫 3년은 집과 학교가 거리가 멀다는 핑계로 조금 늦게 일어나면 차라리 결석해 버리고 말았고, 학교 방송국, 영자 신문반, 학교 밖 연극서클을 오가며 정신이 팔려 있다가 4학년이 되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졸업 후에 원하던 KBS에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할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신입사원은 3개월 동안 연수 과정이 있다. 81년 공사 8기 전 직원을 모아 연수를 하는데, 마지막 평가에서 2등을 해서 부상으로 목침만 한 라디오를 선물로 받았다. 평소에 라디오를 잘 들으시던 할머니는 손녀딸이 방송국에 입사해 받아온 첫 번째 상이라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다.

연수가 끝나서 신입 아나운서가 할 수 있는 처음 방송은 콜사인, 시간과 방송국을 고지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모두 녹음해 두고 자동으로 송출하지만, 내가 방송하던 80년대는 아나운서가 스튜디오에 대기해 생방송으로 시간마다 콜사인을 했다. 할머니가 즐겨 들으신 방송은 오후 4시 <황인용 강부자입니다>였다. 집에 돌아가니 할머니가 반갑게 확인하셨다. “너, 황인용 강부자 그 프로 앞에 ‘잠시 후 네 시를 알려드립니다’ 그 목소리가 은경이 너였지?”

회사 체육대회나 기념행사를 하고 나면 하나씩 나누어 주는 기념 타올을 가져다드리면 차곡차곡 모아 놓으셨다. 그걸 두었다가 어디에 쓰실 거냐고 그냥 쓰세요, 해도 할머니는 무슨 귀한 보물이나 되는 듯 모셔 놓았다. 월급날이 되면 먼저 시장 떡집으로 달려갔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꿀떡과 인절미, 구름떡을 사서 할머니께 가는 발걸음은 구름처럼 가벼웠다.

꽤 오랫동안 우리 사남매를 돌봐 주신 할머니는 많이 늙으셨고, 우리는 다 어른이 되었다. 1898년생인 할머니는 주민등록번호가 98로 시작된다. 동사무소에 가서 서류를 뗄 때면 직원이 주민등록번호를 잘못 썼다고 되묻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할머니는 냉장고 문을 열다가 그대로 넘어지셔서 고관절이 깨지고 말았다. 너무 연로하셔서 마취와 수술을 이길 수 있을까 염려했으나, 철심을 박아야 하는 힘든 수술을 견뎌내며 할머니는 회복하셨다. 고관절에 박은 철심을 제거하는 수술도 너끈히 이겨내셨다. 그러나 이후 조금씩 활동력이 떨어지고 한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신 때에 이르렀다. 햇볕이 좋은 날 우리 형제는 피아노 의자를 마당에 꺼내 놓고 할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를 들이댈 때마다 손사래를 치시며 몰골이 흉하니 찍지 말라 하시던 할머니가 그날은 손주들과 순적하게 찍고, 독사진도 찍으셨다. 그 사진이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될 줄은 몰랐다.

바깥세상이 봄꽃으로 화려한 꽃 대궐을 이루는 계절이 왔다. “할머니 드라이브 가요.” 손녀딸의 간청에 하얀 운동화를 신으시고 부축을 받아 차에 타신 할머니는 연신 “참 좋다….” 하셨다. 공항 가는 김포 길을 달렸다. 창문을 열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할머니는 오랜만에 꽃구경 봄나들이를 하셨다.

할머니가 운명하셨다는 전화를 받은 건 회사 사무실에서였다. 겨울이라 곧 눈이 쏟아질 것 같은 흐린 날 오후였다. 사무실에 말씀을 드리고 회사를 나섰다. 곧장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차를 운전해 할머니와 드라이브했던 길을 달렸다. 아주 긴 긴 외할머니의 삶이 영화처럼 지나갔다.

잘 키워 시집보낸 큰딸이 대구에서 화재로 세상을 떠났을 때, 외할머니는 그날로 생각도, 말수도 잃으셨다. 둘째 딸이 서른아홉에 남편을 잃은 날, 할머니는 당신의 인생을 땅에 묻고, 딸과 그녀의 네 아이를 위해 삶을 던졌다. 그렇게 우리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이름도 어여쁜 난(蘭) 자, 화(花) 자 우리 외할머니.

할머니의 조용하고 단정한 사랑을 먹고 제가 이렇게 어른이 되었어요. 할머니의 김치찌개, 도시락 반찬, 배 아플 때 문질러 주신 그 거친 손. 그 손길에 우리가 다 자랐습니다. 할머니 편히 가세요. 이제 곱게 주무세요.

정난화 할머니의 한 생애가 한 방울 눈물로 뚝 떨어졌다.

 

 

신은경
전 KBS9시뉴스 앵커
전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전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KYWA) 이사장
1981년 KBS 8기 아나운서, 3개월 연수 후 KBS 9시 뉴스 앵커로 12년간 뉴스 진행
《9시 뉴스를 기다리며》, 《홀리 스피치》, 《신은경의 차차차》,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잠언 읽고 잠언 쓰자》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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