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경 칼럼] 카디프 연가
[신은경 칼럼] 카디프 연가
  • 신은경 전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 승인 2024.05.01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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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두기

최근 드라마 <눈물의 여왕>을 재미있게 보았다. 젊은 여주인공 홍해인은 희귀 뇌종양 진단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외국의 첨단 의료기술 도움을 받아 어렵게 수술하고 회복되지만, 지나간 모든 기억을 잃는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수술에 들어가기 전 여주인공은 수술 후 깨어날 자신을 위해 깨알 같은 메모를 남겼다. 특히 남편 백현우를 기억하려는 노력은 안쓰럽고 애절하다. 뇌 수술 후 모든 기억을 잃은 상황에서 그 노트는 그녀의 아름다운 기억을 되살리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우리가 한평생 살면 보통 70~80년이다. 그 삶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은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다. 질병으로 기억을 잃는 참혹한 일도 있지만, 감사하고 행복한 자잘한 기억을 대부분 망각에 묻고 산다. 돌아보면 고단하게 수고했으나 사랑이 있는 수고여서 감사한 행복이었고, 시련과 고난으로 그때엔 허우적거렸어도 지나고 나면 교훈과 열매가 있었음을 발견한다.

나는 이 지면을 통해 지난 일들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저장해 보고 있다. 지난 칼럼에 이어 영국 유학 생활을 기억하고 기록해 보려 한다. 나의 영국 유학 생활은 외롭고, 불편하고, 힘겨웠다. 그러나 추억은 모두 즐거운 기억으로 남는다. 다시 반복하라면 사양하겠지만, 지난날 나의 인생에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잠시 행복에 잠길 수 있다.

영국 유학 생활은 문화차이로 인한 놀라움과 교훈, 그리고 건강을 위해 애쓴 노력이 큰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영국의 웨일스대학교에서 석·박사를 마쳤다. 웨일스는 그레이트브리튼 섬 서남부에 위치한 영국의 구성국으로 수도는 카디프(Cardiff)다. 영어와 더불어 그들만의 언어인 웰시(Welsh)를 공식 문서에 사용하는 독특한 지역이다.

30대 중반에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는 맏딸을 보내는 엄마는 무척 힘들어하셨다. 태어나 한 번도 엄마 품을 떠나 본 적이 없는 딸을 바다 건너로 보내는 것도 힘든 일이고, 결혼해야 할 나이 꽉 찬 딸이 공부하러 간다니 도대체 마땅치가 않으셨다. 밥은 제대로 해 먹을 것인지, 건강을 해치지는 않을 것인지 모든 게 걱정이었다. 가장 중요한 당부 말씀이 아무리 바빠도 끼니를 라면으로 때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마와 홍삼 가루를 섞은 영양식을 한 자루 안겨 주셨다.

나는 그것을 ‘선식’이라 명명했다. 보통 여러 곡식 가루를 섞어 물에 타 먹는 것이 선식이지만, 나는 ‘서서 먹는 식사’라고 선식으로 불렀다. 밥을 해 먹기도 바쁜 날은 뜨거운 물에 마와 홍삼 가루를 타서 선 채로 후루룩 마시는 걸로 끼니를 대신했다. 학교에 갈 때는 점심으로 샐러드 박스를 준비했다. 준비는 어렵지 않았다. 당근, 브로콜리, 갖가지 콩 등을 찌거나 삶아 냉장고에 두고, 스파게티도 짧게 똑똑 잘라 삶아 두었다. 아침에 학교 갈 때 미리 준비해 둔 삶은 채소와 토마토, 오이 등 십여 가지의 재료를 큰 플라스틱 통에 넣고 소스를 뿌렸다. 샐러드 박스 덕분에 건강을 잘 지켰고, 체중은 성인이 된 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하숙집의 루이스 할머니는 처음 집 소개를 하며 나를 놀라게 했다. 소스 팬, 조리 기구 등을 하나하나 들어서 보여주며 모두 “아주 훌륭하다”고 말했다. 우리 같으면 “버려, 당장 버려” 할 만한 낡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유학생 생활은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는 일이어서 집기 대부분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딱 하나, 밥솥은 사야 할 것 같았다. 전자제품 상점에 가서 전기밥솥을 하나 장만했다. 보온까지 되는 비싼 것은 아니고 그냥 요리만 되는 것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거품이 밖으로 끓어 넘쳐 밥을 망치고 말았다. 다시 들고 가서 교환을 요구했다. 그런데 한 번 사용한 제품은 교환해 주지 않는다고 했다. “사용해 보지 않고서 이 제품에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내가 생각해도 절묘한 질문으로 대응해 새것으로 바꾸어 왔다.

하숙집 할머니는 설거지도 희한하게 했다. 아주 뜨거운 물에 물비누를 풀고 접시를 넣어 기름기를 뺀다. 그리고 건져서 그냥 세워놓았다가 물기가 마르기 전에 헝겊 행주로 비눗기를 닦아냈다. 깨끗한 물로 헹궈야 하지 않냐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묻는 내게 할머니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렇게 먹었어도 아무도 죽지 않았어. 날 봐. 이 나이까지 살아 있지 않니?”

모든 물자를 절약하고 오래 사용하는 영국 사람의 경제관념과 문화차이로 무척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은 계속됐다. 학과 사무실에서 행정 일을 보는 레슬리와 친해졌다. 나와 비슷한 나이인 데다 무척 상냥하고 친절해서 마음을 붙이게 됐다. 어느 날 자기 집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집까지 초대하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기쁘게 응했는데 “그럼, 네 샌드위치는 가지고 오겠니? 내가 차를 끓일 주전자는 불에 올려놓을게”라고 말했다. 아니, 내가 먹을 점심 샌드위치는 준비해서 오라고? 조금 놀랐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12월 성탄절이 다가올 즈음 레슬리는 선물상자 두 개를 내밀었다. 놀라는 내게 “하나는 네 생일선물, 하나는 성탄 선물”이라고 했다. 성탄절 근접해 생일이 있는 나는 평생을 선물 하나로 생일선물과 성탄 선물을 합쳐 받아왔는데, 선물 두 개를 따로 받기는 처음이었다.

한 학기가 끝날 즈음, 담당 교수가 제자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집 주소를 알려주며 저녁 8시에 와서 음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테니, 저녁은 다 먹고 오라고 했다. 아니, 또, 집에 초대하며 음료만 제공한다고?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의 집을 오픈해 장소를 제공해 주신 것만으로도 고맙지, 무슨 음식을 뻐근하게 차리길 바라는가? 하는 생각에 과다한 환대와 손님 접대를 당연시하는 생각을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서서 먹는’ 선식을 후루룩 마시고, 샐러드 박스로 점심을 챙겨 먹으며 음식 외에 신경 쓴 또 한 가지는 운동이었다. 수영과 산책, 달리기로 건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니, 실상은 운동이 몸을 위한 게 아니라 정신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아티스트 웨이》를 쓴 줄리아 카메론(Julia Cameron)은 걷기를 ‘움직이는 명상’이라고 했다.

나는 시내를 가로지른 자리에 있는 공원에서 자주 걷고 때때로 달렸다. 그리고 걷기와 달리기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용이 들지 않고 땀이 잘 나서 체중 조절에 좋은 손쉬운 운동이다. 물리적인 땀만 아니라 머릿속의 걱정과 슬픔, 외로움도 다 빠져나갔다. 걷고 뛰는 동안 잡생각이 사라지고 생각이 모여 논문에 써야 할 좋은 문장과 아이디어가 샘솟기도 했다.

줄리아 카메론은 소설가 이브 바비츠(Eve Babitz)의 말을 인용해 수영 또한 작가에게 아주 좋은 운동이라 전한다. 날마다 동네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사이 일상의 잡다한 근심과 불만은 물속 깊이 던져져 저 밑의 고요하고 푸르른 영감의 세계로 내려갔다.

수영은 동네 스포츠 센터에서 했다. 학생 할인이 되어 1파운드, 우리 돈으로 당시 천 원 정도로 아주 쌌다. 머릿속에 가득한 근심과 걱정은 반복적인 동작을 하는 동안 하얗게 비워지고, 그 자리에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영감이 떠올라 논문 주제에 좋은 아이디어가 속속 떠올랐다.

호주 멜버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연구팀은 규칙적인 운동이 두뇌 인지력을 보호하는 데 효과적이며 우울증이나 걱정 등 정신 건강에 좋다고 했다. 주기적인 걷기 운동은 치매를 예방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젊었을 때부터 운동을 빨리 시작하면 효과가 크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렇게 좋은 먹거리와 운동으로 몸 건강뿐 아니라 정신 건강까지도 챙긴 나의 영국 유학 생활은 삼십 대를 무사히 마무리하도록 도와주었다. 가끔 영국으로 공부하러 가지 않았다면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뉴스 앵커로 커리어를 더 오래 이어갔을 것이고 그렇게 외롭고 힘든 고생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전한 그날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신은경
전 KBS9시뉴스 앵커
전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전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KYWA) 이사장
1981년 KBS 8기 아나운서, 3개월 연수 후 KBS 9시 뉴스 앵커 발탁돼 12년간 뉴스 진행
《9시 뉴스를 기다리며》, 《홀리 스피치》, 《신은경의 차차차》,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잠언 읽고 잠언 쓰자》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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