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과 죽음은 이대로 괜찮은가” 의료인류학자 송병기의 묵직한 조언(上)
“우리의 삶과 죽음은 이대로 괜찮은가” 의료인류학자 송병기의 묵직한 조언(上)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4.04.05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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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 하다 '각자도사' 하는 우리 사회에서 존엄한 죽음이란
‘커뮤니티’와 ‘케어’의 정의는 무엇인가, 치매 이후의 삶은 왜 상상하지 않는가

《각자도사 사회》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한국 사회의 삶과 죽음, 고통을 말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보였다. 이 책을 쓴 송병기 작가는 프랑스 파리대학교병원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생애 말기 돌봄을 연구한 의료인류학자다. 한국 사회 노년기의 삶의 질과 돌봄, 치매 치료에 관한 기사를 쓰다가 이 책을 접하고 단숨에 읽었다. 누구나 마주하는 노년과 죽음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돈이 많거나 운이 좋은 사람만이 존엄한 마무리를 얻는다. 삶은 치열한 경쟁이고, 건강은 생존 싸움에 뒤처져 있고, 행복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적 없이 살다가 맞이하는 죽음까지 불평등한 현실이라니.

송병기 작가를 만나 커뮤니티케어, 노인 돌봄, 호스피스와 연명의료, 생애 말기와 죽음 그리고 안락사 논쟁까지 우리 사회의 죽음의 경로에서 만나는 심도 있는 질문들을 던져 보았다. 주제가 다양해 상하로 나누어 소개한다.


 

송병기 작가 프로필
송병기 작가 / 송병기

Q1. 의료인류학자라는 표현이 익숙하지는 않습니다. 의료인류학자를 소개해 주세요.

먼저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류학은 말 그대로 인류에 대한 깊은 이해를 추구하는 학문인데, 범주로 치면 사회과학에 속합니다. 영미권 대학에서는 언어학과 고고학도 인류학과에 포함합니다. 또 인류학 안에서도 진화인류학, 체질인류학, 문화인류학 등 범위가 넓습니다. 인간에 관한 이해는 광범위하죠. 의료인료학은 문화인류학의 한 분과입니다. 의료인류학자는 의사나 간호사가 보는 의료와 다른 방식의 이해를 추구하죠. 인류학자는 사회와 인간을 총체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각 분야의 일종의 비밀의 화원이 펼쳐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와 정치, 경제 모두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렌즈죠. 그중에 의료도 있고요. 부족사회든 산업사회든 인간은 모두 태어나서 아프고 죽죠. 그럼에도 각 문화권과 시대에 따라 아픔, 질병, 그를 둘러싼 해석은 달라집니다. 의료인류학자는 질병, 아픔, 노화, 죽음을 현대의학이 주목하지 못하는 사회적 맥락, 정치적 맥락, 경제적 맥락의 관계성에 기초해 다룹니다.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는 학문 체계이고 그걸 연구하는 사람이 의료인류학자죠.

 

Q2. 의료인류학은 어느 나라에서 발전했나요?

사실 인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발달한 국가의 특징이 있는데요. 인류학이 지닌 아픈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제국주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타자를 연구하면서 성장한 학문 체계로 식민제국 통치 시 좀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방법을 찾으면서 시작됐으니까요. 통치권자가 너무나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피지배 민족을 연구한 것이죠. 타자의 언어와 풍습을 연구해야만 그들의 이해를 바탕으로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으니까요. 즉, 누군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서 발전한 학문이 인류학입니다. 그래서 현대 인류학이 발달한 국가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과거 제국주의의 주체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그랬고요. 미국은 좀 예외적입니다. 인디언, 유색인종 등 내부의 다인종사회에 대한 정치적 이슈가 있죠.

그래서 미국 중심의 인류학은 문화인류학이에요. 한편 영국과 프랑스는 전 세계 곳곳에 여러 식민지를 지배했고 그 흐름 속에서 인류학이 발달했거든요. 다른 사회의 제도, 언어, 관습 등을 살펴보는 사회인류학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오늘날 문화인류학과 사회인류학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 제국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내부 반성으로 더는 인류학이 과거처럼 식민지에 부합하는 학문도 아닙니다. 현대 인류학은 체계적인 이론과 방법론을 갖춘 사회과학으로서, ‘비산업 사회’뿐만 아니라 ‘산업 사회’도 연구 대상으로 삼으며,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추구합니다. 

 

Q3. 2차세계대전 이후 과학과 이성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함께 인류학이 더 발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2차세계대전과도 연결돼 있죠. 그 시기 전후로 탈식민지 운동이 일어났고, 전쟁 이후 식민지들이 독립했습니다. 그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현대 인류학은 타자성을 성찰했죠. 우리 안의 소수자, 우리 안의 파시즘 등 도대체 타자는 누군인가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학문 체계로 급선회했어요. 예컨대 오늘날 의료인류학자는 노인과 말기 환자, 죽음을 연구하고, 또 어떤 인류학자는 직접 감옥에 들어가 형벌체계의 감옥을 성찰해 현장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난민 문제, 이민자 문제도 인류학 연구에 들어갑니다. 대표적으로 성소수자와 여성 문제, 빈곤 문제 등을 다각적으로 살펴보는 학문이기도 하죠.

 

Q4. 살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는 등 누구나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합니다. 《각자도사 사회》를 보니 송 작가님은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특별히 죽음의 주제에 깊은 관심을 두고 연구하셨는데 왜 특별히 죽음의 주제에 밀착하게 되셨는지요?

사실 이 주제를 정한 것은, 대학원 때 연구 주제를 잡으려고 많은 문헌을 접하면서 개인적인 경험보다는 사회적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제가 끌리는 주제를 정하다 보니 ‘죽음’을 택했습니다. 죽음은 개인적 경험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데 그때 어떤 문헌이 좀 각별하게 들어왔습니다. 돌봄, 노화, 죽음에 관한 인류학 연구들이었어요. 그런 문헌들만 일부러 찾아 읽은 건 아닌데 특별히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 경험 때문인 것 같아요.

부모님이 맞벌이로 바쁘셔서 초등학교 시절 하교하면 집 부근 조부모님 댁에 갔습니다. 조부모님이 주로 저를 돌봐주셨죠. 거기서 노인 세대의 삶에 관해 듣고 보고 경험했어요. 근처에 살던 어르신이나 친지들이 자주 오셔서 누가 돌아가셨다더라, 혹은 자고 있는데 귀신이 왔다더라, 굿을 했다더라, 어느 병원이 좋다더라 등의 이야기를 곁에서 자주 들었습니다. 자식 걱정하는 거, 늙으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둥 듣고 싶지 않아도 계속 들은 거죠.

프랑스에서 공부했는데, 프랑스 노인의 죽음은 어렸을 때 보고 들은 것들과 좀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 한국의 어른들은 대개 집에서 임종하셨고, 가족들 특히 여성이 말기 돌봄을 맡았죠. 그런데 프랑스는 나의 권리, 죽음의 자기 결정권을 굉장히 중시하는 사회로 보였습니다. 가톨릭 문화권이지만 죽음을 깔끔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있는 것 같았고요. 대개 시설에서 말기를 보내고 임종을 하더군요. 모두가 아프고 늙고 죽는데 어떤 나라의 죽음은 왜 다를까, 호기심이 생긴 거죠. 연구를 하면서 곧바로 깨달았지만, 이는 정말 순진하고 단순한 비교였습니다. 두 사회 간의 차이점도 있지만 공통점도 많고, 또 각 사회의 복잡다단한 맥락은 자세히 살펴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Q5. 디멘시아뉴스에서 세계 치매 마을 이야기를 기획하며 첫 편으로 프랑스 랑드 알츠하이머 마을을 소개했습니다. 물론 세계 치매 마을의 원조는 네덜란드 호그벡 마을인데요. 프랑스에서 태어난 노인은 사회적 지지 체계로 한국보다 존엄한 마무리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랑스와 한국의 ‘노년과 죽음’은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작가님 책에 ‘좋은 죽음’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우선 개인적으로 생각하시는 좋은 죽음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나에게 ‘좋은 죽음’은 뭘까? 심플한 답은 이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통증은 좀 조절됐으면 좋겠고, 최소한의 의료적 처치와 함께하는 장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특히 아끼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장소였으면 좋겠고요. 그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좋겠다 정도인 것 같습니다. 사실 소박한데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죠. 왜냐하면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까요. 한국 사람 10명 중 8명이 병원에서 사망합니다. 그분들이 병원에서 죽고 싶어 했을까요? 또 병원에서 고통스럽지 않게 죽음을 맞이했느냐 질문하면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습니다.

코로나 사태 때는 중환자실에서 면회도 안 되는 상황에 죽음을 맞이한 분도 많았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죽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요. 좋은 죽음에 대한 정의는 심플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죽음과 관련된 많은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고요. 개인의 운과 돈으로 작용하는 죽음이 아닌, 누구나 가능한 존엄한 죽음으로 사회 변화가 전제돼야 하죠.

 

Q6. 한국에서 중증 치매 노인을 자녀들이 따뜻하게 케어할 수 있을까도 정말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선생님 책에도 나오지만, 개인이 얼마나 많은 경제적 부를 가지고 있는가와 자신이 원하는 죽음은 상관관계가 있으니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죽고 싶지만, 배우자와 자녀들이 그 시간에 나와 함께 있는 것을 힘들어하면 강요할 수도 없죠. 치매 현장 이야기를 취재하다 보니 요즘은 손주가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돕는 영케어러(Young Carer)가 많습니다. 맞벌이 부모로 인해 조부모의 손에 자란 청년들이 그 조부모의 치매를 열심히 돌보고 있고요. 송 작가님이 책에 “좋은 죽음은 좋은 사회와 연결돼 있다”고 쓰셨는데 우리나라에 좋은 사회가 올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좋은 사회는 좋은 정치가 만드니까요. 지금 전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나쁜 사회로 후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피로 사회 현실에서 좋은 사회가 좋은 죽음을 이끈다면 가능성 제로로 보이진 않을까요?

‘좋은 죽음’과 ‘좋은 사회’는 일종의 끊임없는 질문의 과정적인 것입니다. 좋은 사회란 이것이다, 라는 완성형이 아니고요. 그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과정에서 현 시스템의 보완, 관계의 재배치 등을 이루어 가는 것을 뜻하죠. 질문하는 과정에서 변화가 담보(擔保)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은 우리가 헌법에 근거한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지만, 지금 완벽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지향점인 거죠. 어떤 갈등과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봉건 혹은 왕정과는 다르다는 것을 민주주의의 원리로 풀어가는 지향점이죠. 그러한 원칙으로 갈등과 문제를 풀어가되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그 방향으로 더 나아가려고 하는 과정을 말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만든 헌법에 민주공화국이라고 쓰여 있고 우리는 아무 문제 없이 존엄과 평등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 산다는 것은 게으른 생각 방식입니다. 국민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사회가 좋은 죽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Q7. ‘커뮤니티케어’에 대해 작가님 책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탈병원화, 탈가족화라는 주제에 관심을 두고 읽다 보니, 이제 취약계층 대상의 복지정책은 곧 사라질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요. 현재 정부가 시행하려는 커뮤니티케어의 보완점은 무엇인가요?

커뮤니티케어에서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커뮤니티가 무엇'이고, ‘케어가 무엇인가'에 대한 숙고가 부재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시골에서는 정부에서 시행하려는 커뮤니티케어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의사가 없기 때문이죠. 그러면 시골에는 커뮤니티가 없는 것인가? 우리가 보통 지역 커뮤니티 하면, 드라마 ‘전원일기’를 떠올리죠. 그런데 정부가 말하는 ‘커뮤니티’는 무엇인지 정의가 없습니다. 커뮤니티케어 정책이 시행되는 곳은 의사가 많이 몰려 있는 대도시거든요.

그럼 대도시의 커뮤니티란 아파트 단지를 말하는 것일까요? 혹은 서울같이 사실상 이주민이 모여 만들어진 도시, 즉 고향이 제각각 따로 있고 토박이들은 불과 몇 퍼센트도 안 되는 도시를 대상으로 하는 정책일까요? 초등학교를 이 지역에서 나왔다가 대학교는 저 지역으로 갔다가 직장은 또 어딘가로 옮겨 다니는 그런 대도시 사람에게 커뮤니티라는 공동체의 관념은 무엇일까요? 어려운 질문이고 철학적인 질문입니다만, 정책의 기초인 정의가 없습니다.

‘케어’도 마찬가지죠. 정부에서 얘기하는 것은 집에서 늙고 집에서 죽을 수 있게끔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그 케어는 가정방문간호사가 방문하고 의사가 왕진해서 방문진료를 하는 것인데 대다수의 의사는 자기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병원에 오셔야 피 검사도 할 수 있고 엑스레이도 찍을 수 있고 실제적인 진료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학습된 주체들이니, 실제로 가정에 가서 뭘 해야 하냐고 저한테 반문하는 의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정부에서 이야기하는 커뮤니티케어 담론과 실제 현장이 전혀 안 맞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책 보완이 필요하고 예산도 중요합니다. 그보다도 제가 먼저 드리고 싶은 말은 커뮤니티케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케어라고 하기도 하지만, ‘돌봄’도 같이 쓰는데 사실 돌봄도 우리가 진지하게 사회적으로 깊이 토론해 본 적이 없습니다. 돌봄 노동자, 돌봄의 위기를 말하기 시작했지만, 정작 돌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얼마나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는지 의문입니다.

 

독자들과 북토그 중인 송병기 작가 / 송병기
독자들과 북토그 중인 송병기 작가 / 송병기

Q8. 말씀하신 점에서 우리 고전 이야기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15세 중2 소녀에게 1억 원 줄 테니까 신을 달래는 재물로 너를 바쳐라, 이 이야기가 감동적인 이야기로 전해지는 게 한국 사회잖아요. ‘효(孝)’는 특별한 사람이 하는 특별히 추구해야 할 소중한 가치처럼 강조되는데,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게 당연하듯이 자녀도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말하지는 않죠. 현대사회의 사랑 자체가 책임을 안 지는, 찰나적 욕구의 모습이잖아요. 돌봄의 질문에 해당하는데요. 도저히 자녀가 부모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인 경우, 집보다 시설이 나은 사례도 있거든요. 작가님 책에서 한국 사회는 노인의 삶의 질보다는 그들의 취약함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노인 돌봄-노인은 국가의 짐인가’라는 챕터에서 썼지만, 국가는 왜 인구 분류에서 노인을 의존적 존재로 규정하는가, 이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복지제도를 말하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시스템을 생각합니다. 취약계층을 도와야 한다, 에서 그 ‘취약’이라는 말이 무엇인지도 질문해야겠지만, 취약계층의 인식이 어디서 유래했는가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첫 번째는 복지제도 바탕의 근거에 사회보장기본법이 있죠. 크게 출생, 양육, 질병, 사망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국민을 돌봐야 한다는 맥락입니다. 그 안에 건강보험도 들어가고 산재보험도 들어가고 이른바 사회보험이 들어갑니다. 그 사회보장이라는 단어 자체는 ‘소셜 시큐리티(Social Security)’를 번역한 것이죠.

여기서 ‘보장’이라고 번역된 ‘시큐리티’는 무엇일까요? 라틴어 ‘Securus’에서 나왔는데 ‘Se’는 ‘없음’, ‘Cura’는 ‘걱정’입니다. 즉, 걱정을 없앤다는 게 시큐리티죠. ‘소셜 시큐리티’는 ‘사회적 걱정을 없앤다’입니다. 그러면 소셜 시큐리티에서 도대체 무엇이 사회적 걱정이고, 그걸 없앤다고 하면 출생, 양육, 질병, 사망에 이르는 생애 전 주기에서 사회적 걱정을 끼칠 수 있는 요소를 찾아 없앤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회적 걱정을 없애는 도움의 대상을 역사적으로 건강한 남성 노동자로 둔 것이 복지제도의 기원입니다.

그 건강한 성인 남성이 밖에서 일을 하고 임금을 벌면서 계속 재생산할 수 있게끔 집에서 무임금으로 가사노동을 하는 피부양자가 여성이었습니다. 이 구도에서 복지제도가 발달해 왔죠. 남성 노동자가 일하다 다쳤을 때 빨리 다시 일터로 복귀할 수 있게끔 치료를 돕는 제도로 산재보험이 나왔고요. 마찬가지로 의료보험도 치료할 수 있게끔 의료비를 지원하고 소득을 보존하는 제도로 시작했습니다.

소셜 시큐리티는 노동자들이 노동력을 계속 생산하도록 생산 인구가 지치지 않고 은퇴할 때까지 지원하는 제도로 작동해 왔습니다. 사실 한국 정부뿐만이 아닙니다. 프랑스에서도 요양원에 입원한 노인을 의존적 존재(personne âgée dépendante)라는 명칭으로 부릅니다. 한국과 프랑스는 어떤 면에서 공통점이 있어요. 근대국가가 보는 노인에 대한 시각이 의존적 존재 즉, 생산이 가능하지 않은 인구로 규정합니다.

이러한 역사적·제도적·사회적 맥락에서 왜 한국 정부는 노인을 취약 대상, 즉 사실상 노동 생산 가능 인구에 피해를 주는 인구로 규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여성도 노동시장에 많이 진출해 있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생산 인구에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노인을 시설로 보내는 사회적 현상과 맞물립니다.

 

Q9. 선진국들이 먼저 치매를 국가에서 책임지고 돌보는 방향으로 노인복지제도를 만들었고, 우리도 치매국가책임제를 시행했습니다. 사회의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 인구가 치매 부모를 돌보느라 사장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뜻에서 그 맥락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러한 사회적 상상이 제도로 스며든 것이죠. 커뮤니티케어에서 '케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이루어질 때 사회보장, 복지의 근간도 우리가 갱신할 수 있습니다. 치매국가책임제도 굉장히 다른 식으로 곧 개선될 것이라고 봅니다.

사실상 국가가 치매 환자를 대상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별성을 가진 고유한 개인이 아니라, 가족에게 폐를 끼치고 큰 부담이 되는 존재, 건강한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는 문제로 보는 것이죠. 국가가 치매를 책임진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치매 진단을 강화하고, 치매 환자를 철저히 관리하겠다는 의미는 아닐까요? 치매는 마치 재난 예방 및 관리처럼 취급됩니다. 이런 현실에서 정작 중요한 치매 이후의 삶을 상상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현재 치매안심센터가 주력하는 프로그램도 주로 초기 진단에 집중하고 있고요. 진단에 많은 예산과 활동이 부여되는 것이 치매국가책임제의 특징이죠. 왜 우리는 진단에 그렇게 신경을 쓰고 치매 이후의 삶, 치매 환자가 사회적 활동을 하는 그 관계성에 대한 질문과 상상은 없는가. 거기에 대한 활동 지원이 없는가 이 질문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Q10. 치매안심센터가 진단에 집중하고 진단 후 조치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것은 제가 기획 기사로도 다룬 큰 문제입니다. 대학병원 신경과 교수가 각 지역의 치매안심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는데 그분들 모두 이 문제를 알고 있어요. 치매안심센터가 많은 치매 환자의 명단 작성에 집중하고 있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와 인터뷰해 보면 그들도 이 문제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데 너무 힘들어합니다. 예를 들면 최근 노인 운전기사의 사고가 잦으니까 면허증을 반납하면 10만 원 주겠다고 했지만 실제 반납률은 매우 낮죠. 택시 운전하는 노인 기사는 의무적으로 치매검사를 받게 했는데 그분들이 치매안심센터에서 화를 내십니다. 치매안심센터의 검사 직원은 감정노동에 시달리고요. 작가님이 치매 진단받은 이후의 삶 그분들의 사회 관계성을 제공하려는 상상력은 왜 없을까 하는 질문은 현재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현 정부는 한 발짝도 더 나간 게 없죠.

그래서 참 어렵습니다. 우리가 그 치매 어른의 삶을 생각하면 아직은 위험한 존재로만 인식합니다. 집에 혼자 계시게 했다가 가스 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는 잠재적 위험군으로 여기고요. 배회 어른의 실종 소식 혹은 집을 찾아드렸다는 미담 뉴스가 자주 나옵니다. 그러니까 집을 찾아드려야 하는 사람, 안 찾으면 뭔가 큰일 날 것 같은 보호의 대상 정도로 우리는 인식하죠.
 

Q11.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화가 윌리엄 어터몰렌이 더는 붓을 들 수 없을 때까지 그려간 자화상의 변화를 보면 치매를 앓는 사람이 사람 얼굴을 어떤 모습으로 보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배우자 지원과 함께 마지막까지 작품 활동을 했죠. 네덜란드, 프랑스, 덴마크 등의 치매 마을은 치매 노인을 절대 고립시키지 않고 그 안에서 하고 싶은 사교 활동을 마음껏 하게 하는데 별로 비싸지 않은 입소 비용으로 그런 삶을 누립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배회 환자 문제도 잘 해결하지 못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죠. 치매안심센터에 배회감지기를 신청하면 1년을 기다려야 하는 일도 있고요. 그리고 실질적인 돌봄 문제는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를 활용하라고 하니 치매안심센터가 실질적인 돌봄과 관련해 제공할 수 있는 게 없죠. 실제로 제가 요양병원에서 가족 케어를 해보니까 천주교와 기독교에서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하고 있더군요. 숭고하고 아름다운 역할로 보였고요. 여전히 정부가 제대로 역할을 안 하는 것 같고 교회와 성당이 그 사이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이런 모습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역사적으로 국가의 복지 체계의 빈 곳을 종교가 감당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서양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국가가 사실상 손을 못 대는 부분을 종교기관 봉사자들이 많이 담당해 왔죠. 취약계층 돌봄이든 호스피스 같은 제도적 장치에서든 우리 사회의 부족한 부분을 종교에서 메꾸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교육도 체계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을 때 종교기관이 교육기관을 먼저 세워서 실행하지 않았습니까?

국가 체계가 정비되면서 종교기관이 전면에 나선 교육기관이 하나씩 물러서는 것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고요. 그런데도 종교의 역할이 복지 체계나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지나치게 많이 담당하는 것은 우리가 토론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제 돌봄의 공백을 종교가 아니라 정치로, 국민 세금으로 메워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12. 요양병원도 종교기관이 운영한다고 하여 꼭 시스템이 낫지는 않더군요. 의료서비스와 간병인 교육이 얼마나 잘 돼 있냐가 관건이고요. 비용도 너무 많이 들면 부담스럽습니다. 단기간 쓰고 효과를 보고 중단해야 하는 비싼 항생제를 장기간 써서 고액의 비용이 청구된 경험도 겪었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간호사, 간호조무사, 간병인의 협업이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간호간병통합서비스가 뿌리내리려면 보호자의 생각도 변해야 하고, 병원 인력구조도 재편돼야 하죠. 결국 인력의 문제고 요양병원이라는 특수한 수가 구조에서 창출하기 힘든 수익성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요.

말씀하신 것에 매우 많은 요소가 섞여 있습니다. 지금 재중 동포들이 간병인으로 많이 들어와 있는 상황입니다. 이제 가족 보호자가 있든 없든 환자가 안심하고 병원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냐 질문해야 할 시기입니다. 대도시의 큰 병원은 비교적 간호사를 많이 채용하지만, 지방의 병원들은 간호사 수급 문제도 차이가 있고 동시에 간호사 처우 문제, 노동 조건의 차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분들이 어떤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가, 사실상 간호사 면허를 가진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활동하는 숫자는 절반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분들은 왜 유휴 간호사로 있을까요?

우리가 자식이 꼭 부모 곁에서 직접 간병해야 한다는 유교 문화 식으로 해석하면 문제가 안 풀린다고 봐요. 저는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프랑스 가족들은 가족애가 없느냐? 아니에요. 가족의 가치가 소중하지 않은 사회는 없으니까요. 프랑스인들도 환자를 면회하고 환자 옆에서 간병하기도 하죠. 그렇지만 그들은 생계가 흔들릴 정도로 간병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는 게 핵심입니다. 우리는 유교 문화에 익숙해 아프신 부모 곁에 있어야 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간병 문제, 치료와 돌봄 문제를 제도로 정비하고 연결해야 하죠. 건강보험과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치료와 돌봄을 사실상 구분해 놓았는데, 일상에서 우리가 가진 인식에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까요?

마치 의료는 전문가의 일, 즉 의사의 처방과 간호사가 동원돼야 하는 일로 보고, 그 외의 영역으로 돌보는 일, 수발드는 일은 가족이 알아서 풀어야 할 일이지 전문가한테 맡길 수 없다는 인식이 강하죠. 그래서 그런 제도와 일상의 문제에 간호사 현실의 문제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맡고 있는 간병 문제를 통합적으로 들여다봐야 합니다. 간병 급여를 연결해서 간병 노동을 양지로 끌어올리고 이분들을 어떻게 노동자로 재정립할 것인가, 하는 논의와 긴밀하게 연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 예산이 드는가 하는 연구도 많이 진행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정치적인 결정입니다.

총선 이후에 간병 급여화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지켜봐야 하죠. 많은 사람이 요청하고 있고 지난 대선에서도 시민단체들이 간병비 문제 해결 요구를 많이 했고요. 간병 급여화는 오랫동안 의료진도 이야기해 왔거든요. 특히나 지금 50대는 부모의 임종을 경험하고 있는 세대입니다. 50대 자신의 질문으로 다가온 문제가 간병과 돌봄 문제죠. 앞으로 정치적인 변화도 따라올 거라고 기대합니다.

(하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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