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용태
효자병원 신경과장/연세대 외래교수
초신함을 아십니까?
질문1) 12월 11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질문2) 초신함을 아십니까?
너무 어려운 가요? 질문2부터 답하겠습니다.
초신함은 미국 해군의 주력 이지스함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름이 무엇인가 생소하지요, 영어 느낌이 없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납니다. 약소국 한국을 바닥까지 떨어지게 한 치명적인 전쟁이 시작 된 것입니다. 전쟁 초반 대한 민국은 일방적으로 밀리며 퇴각하여 낙동강에서 사활을 건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전면적으로 개입하고,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 작전을 시행하자 전세가 일순간에 역전됩니다. 전쟁을 크리스마스 이전에 끝내려고 생각한 맥아더는 서쪽으로 압록강까지, 그리고 동쪽으로는 두만강 유역까지 전선을 급속하게 전개합니다. 동쪽으로 진격하던 미군 중 미해병대 1사단 1만5천명은 장진호 쪽으로 북진을 시작합니다. 다급해진 북한 수뇌부는 중국의 참전을 요청하였고, 내전이 막 끝나고 혼란을 수습하던 모택동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2차세계 대전 때 보았던 미국의 군사력에 대한 두려움과 장개석 잔당에 대한 국내 혼란이 수습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참모들이 반대하는 상태에서 과연 참전을 해야 할지 고민한 것이지요. 고민 끝에 모택동은 주변 대다수의 참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전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중국군으로 하지 않고 인민의용군의 형식을 취합니다(그만큼 미국의 눈치를 의식한 것이지요).
당시 모택동의 군사적 신임을 가장 받았던 팽덕회가 의용군 형태의 군대를 조직하여 30만 대군이 북한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팽덕회는 개입 초기부터 동쪽과 서쪽으로 크게 분리되어 진행되는 유엔군의 약점을 공략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팽덕회에게 126km 의 좁은 도로로 만 흥남으로 연결되어 되어 있는 인공호수 장진호는 미군을 유인 섬멸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로 생각하였습니다. 11월 2일 전투를 격렬한 첫 전투로 중공군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중국 인민의용군은 북쪽으로 유인 퇴각하였고 이를 추적하여 미해병사단과 국군은 장진호로 진군하게 됩니다. 당시 크리스마스면 본국으로 돌아갈 것으로 들뜬 미군과 같이 전투에 참여하던 국군에게 갑자기 강추위와 함께 장진호 주변 협곡에서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납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유엔군은 전멸을 피하기 위하여 11월 30일 철수를 결정하였지만 포위를 뚫고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전세가 미국으로 알려지자 미국의 조야와 언론은 난리가 나게 됩니다. 이차세계대전때도 경험하지 못한 미국 해병대 사단의 전멸이 현실화 되는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이것만 막기 위하여 모든 병력을 포기한 군사병력만 수송기를 이용한 철수를 권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해병대 사단장인 스미스(Oliver P. Smith) 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퇴각이라고, 시펄, 우리는 퇴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방향으로 전진하는 것일 뿐이다; Retreat, hell! We're not retreating, we're just advancing in a different direction." 라는 말을 하며 부상자만 수송기를 통하여 철수시키고 모든 군사 무기를 그대로 가지고 12월 9일 황초령을 장악하고 드디어 12월 11일 저녁 최종 부대가 함흥에 도착함으로써 그 유명한 흥남 철수까지 이루게 됩니다. 미 해병대가 군사무기를 포기한 것은 퇴각이나 항복 때문이 아니라 좀더 많은 민간인을 배에 태우기 위할 때 였습니다.
질문2의 대답이 나왔네요. 12월11일은 장진호 전투를 완수한 매우 의미 있는 날입니다. 이 전투는 미군이 얼마나 최악의 조건에도 매뉴얼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 남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전투입니다. 미군은 전쟁을 할 때 전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투 그 자체보다도 병참을 매우 중요시 여기며 병참을 건설합니다. 좁은 협곡을 진행하면서도 도로와 간이 비행장 등을 건설하여 퇴각 중에도 보급이 유지되며 비행기 병력의 엄호를 받을 수 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 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의 조야에서는 사람만 퇴각 시키자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진호 전투는 진 전투이지만 절대 지지 않았던 그래서 미국 군사역사교과서에 반드시 실리는 전투입니다. 더 나아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초신호 라는 배를 만들기 까지 합니다. 초신은 바로 장진호의 일본 발음입니다. 한반도 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입수할 수 있는 대한민국 지도는 일본제국주의가 만든 조선 지도이지요.
인생을 살아 가다 보면 유년시기를 거쳐 청년, 장년을 거치면서,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꽃을 피웁니다 하지만 노년에 들어서면 점차 몸이 아파오고, 우울과 불안이 다가오고, 가난해지는 장진호의 협곡에 빠지게 됩니다. 점차 우리는 이 곳에서 절망하게 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싶어 집니다(마치 장진호 전투에서 모든 물자를 버리고 사람만 빼 오자고 하던 그때처럼). 많은 사람들이(노년 자신이던, 아니던) 노년기에는 장년기, 청년기를 생각하며 점점 퇴각 되어 가는 것 같은 생각을 하지만 저는 장진호 전투를 보면서 스미스가 하였던 Retreat, hell! We're not retreating, we're just advancing in a different direction 이 말이 생각납니다. 내가 늙어 가고 쭈그러져 간다고, 빌어먹을 지옥에나 가는 말 이나 해라. 나는 했던 일이나 유지 하고 어떻게 하던지 떨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게 아니고 다른 방향,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래서 이 전투가 더 위대한 것이 아닐까요? 내 인생 초 청장년이 위대하듯이 지금 현재 나아가고 있는 지금 노년기도 위대한 것이 아닐까요?
@ 팽덕회(펑더화이)를 아십니까?
모택동과 휘하에서 젊은 날 야전 사령관으로 뛰어난 두각을 드러내며 모택동이 중국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군입니다. 6.25 전쟁 때 세계 최강이었던 미군을 맞아 미군이 도보행군을 싫어하고 야간전투를 피하며 과도하게 공군에게 의존하는 것을 꿰뚫어보고 주로 야간 포위 매복 전술을 구사하여 수세였던 전쟁의 흐름을 바꿉니다. 6.25 전쟁에 중국군으로 서도 사망자만 20만명 가까웠고, 모택동의 아들, 팽덕회 아들도 참전해서 사망한 전쟁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모택동은 대만을 점령하여 통일을 이루기 일보직전 이었으나 6.25 전쟁으로 미국은 모택동에 대하여 강경한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대만 해협에 7함대를 주둔하여 중국 통일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게 됩니다. 지금 중국이 북한을 남 보듯이 할 수 없는 역사적 배경이 있지요. 하지만 팽덕회는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을 비판하다가 숙청당하고 결국 감옥에서 사망하는 비운을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