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10
[김은정] 소설 속의 치매 이야기 10
  • DementiaNews
  • 승인 2017.10.18 09: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은정(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 -이승우의 「오토바이」

치매와 관련하여 가장 연구하고 싶은 작가를 꼽으라면 두 말 없이 ‘이승우’를 꼽을 것이다. 그럴 만큼 작가 이승우는 다양하고 의미 있는 치매 소설을 발표하고 있는 작가이다. 「검은 나무」, 「오토바이」, 「일식에 대하여」, 「방」 등의 작품에서 이승우는 치매를 다양한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나쁜 놈, 천하의 나쁜 놈.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인간이면 그럴 수 없는 일이야. 너는 인간이 아니야. 천벌을 받을 거야. 천벌을 받아야 해. 너 같은 나쁜 놈이 천벌을 받지 않는다면 하늘이 무너진 거야. 하늘이 벌을 안 내리면 내가 내린다. 내가 가만 안 둔다. 너는 나쁜 놈이야. 용서할 수 없어. 용서할 수 없어.” 어머니는 나중에 울부짖었다. 처음의 울분과 분노에 울음이 섞여들면서 차츰 다른 감정으로 변색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가 표현한 것은 회한과 자책이었다.

「오토바이」는 어머니가 쓰레기 탱크에서 발견되었다는 연락에서 시작된다. 오토바이 배달기사인 ‘나’의 어머니가 지닌 치매 증상은 쓰레기 탱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쓰레기 수거 미화원에게 발견되고, 119까지 동원되어 어머니를 집으로 옮기려고 해도 어머니는 꼼짝하지 않는다. 반드시 내가 가야만 하고, ‘나’에게 엄청난 욕설을 퍼부은 다음에야 겨우 집으로 옮길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의 포인트는 작품 첫머리부터 등장하는 ‘버렸다’에 있다. 어머니는 쓰레기통 속에 자신을 ‘버린다’, 그리고 그 버린 주체가 아들인 ‘나’라고 생각하고, 욕설을 하고 떠든다. 어머니의 이 치매 증상은 자신이 아들인 ‘나’를 버렸다는 자책감에서 시작된다. 실제로 나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은 존재이다. 이유 없이 버려진 나는 삼촌 집에서 자라면서, 사람들이 많고 밝고 넓은 데에서는 불안하고 숨쉬기가 어려워질 정도의 공포를 느끼곤 했다. ‘두더지 같은 놈’, ‘이상한 놈’이 나를 칭하는 이름이었다.

이런 나를 구원해 준 것이 바로 ‘오토바이’이다.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하면서 겉으로 드러내어 그리워하면 안 되는 이름인 ‘어머니’에 대한 아픔도 차츰 무뎌졌고, ‘어딘가엔가 박히기 위해 날아가는 탄환’과 같은 세월을 살아갈 수가 있었다. 이런 나에게 다섯 살 때 떠났던 어머니가 삼십 년이 지나서 치매 상태가 되어 돌아온다.

의식이 선명하게 지배하는 동안은 돌아올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그러니까 내 앞에 나타난 어머니는, 내가 생각하기에, 어머니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의 무의식이었다. 무의식의 상태가 되어서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돌아오기 위해 무의식이 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저렇듯 대책 없는 정신의 도치가 불가피했던 거라고. 30년 만에 돌아온 낯선 노인을 어머니로 받아들이기 위해 나에게는 그런 식의 이해의 과정이 필요했다.

이승우의 「오토바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정신의 도치’이다. 분명 나를 버린 것은 어머니인데, 무의식의 상태로 돌아온 어머니는 자신이 아들에게 버림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버림받은 아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의 도치’인 것이다.

어머니가 보이는 또 다른 치매 증상은 어머니에게 다섯 살의 ‘나’가 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둡고 좁은 벽장이나 헛간 속에 숨어 잠이 들곤 했던 어린 시절의 나처럼 어머니는 베란다 한쪽 구석의 수납장 안이나 먼지 쌓인 고장 난 전축 틈에서 잠든 채 발견되곤 한다.

이렇게 30년이 지나 아들에게 찾아와서 보여주는 어머니의 치매 증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들의 표현대로 한다면 ‘어머니의 무의식’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 아들이 겪었을 그 두려움과 막막함을 ‘정신의 도치’를 통해 그대로 같이 아파하고자 하는 마음일 것이다. 일반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죄책감’인 것이다.

아들을 버렸다는 죄책감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던 어머니가 치매 상태가 되어 아들에게 돌아왔다. 그 어머니가 아들이 겪었던 아픔을 그대로 겪어야만 자신이 아들에게 저질렀던 ‘죄’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즉 그런 죄책감이 어머니가 이상행동 증상을 보이는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순간 어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어머니는 욕을 하면서도 나를 찾았다고 했다. 지난번도 그랬다. 그전에도 그랬다. 어머니는 쓰레기 더미 속에 들어가 내가 나타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를 기다리기 위해 쓰레기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중략) 어머니는 나쁜 놈이라고 욕하고 자기를 버렸다고, 용서할 수 없다고 소리 질렀다. 그건 나의 대사가 아닌가. 그러나 오래전의 대사였다.

아들인 ‘나’가 어머니에 대해 마음을 여는 계기 역시 어머니의 치매 증상이 아들을 버렸다는 자책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 순간부터이다. 그리고 그때 아들인 내가 한 행동은 어머니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달리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나를 고통에서 구원해 준 나의 ‘오토바이’에 어머니를 태움으로써 진정으로 어머니를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야윈 몸을 받쳐 들었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바구니 바닥에 담요를 깔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몸을 그 위에 놓았다. 어머니를 무릎을 올려 세우고 앉은 자세 그대로 얌전했다. 내 오토바이는 어딘가에 박히기 위해 날아가는 탄환처럼, 그러나 실상은 어디에도 박히지 않기 위해 돌진했다. (중략) 머릿속이 흐릿해지는 느낌이 찾아왔다. 그 대신 핏줄이 솟구치고 근육이 파르르 긴장하며 일어섰다. “버린 게 아니에요, 어머니, 어쩔 수 없었다면 비난할 수 없는 거예요, 어머니.”

이승우의 <오토바이>에서 보여주는 치매는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정한 화해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아들을 버렸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어머니의 치매 증상은 결국 아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고자 한 어머니의 마음이었고, 이러한 마음을 그대로 이해하게 된 아들 역시 자신을 ‘좁은 벽장이나 헛간’ 속에서 구원해 준 ‘오토바이’에 어머니를 싣고 달림으로써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어머니가 똑같이 느끼도록 한 것이다. 피해자인 ‘나’는 가해자인 ‘어머니’가 더 이상의 ‘정신의 도치’를 통한 아픔을,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이 30년 만의 화해는 마음 깊은 곳의 ‘진심’을 ‘치매’가 드러내 줌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